락음악 소개, 락음악의 이해

1. 락의 정의
초기 로큰롤(rock’n’roll)이 차차 ‘R&R’의 약자로 표시되다가, 더 축소된 록(rock)으로 고정된 명칭이다. 록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60년대 초인데, 이 무렵 록 뮤직은 초기 로큰롤과는 표현양식이나 내용 면에서 예술적으로 세련되기 시작하여, 전위음악을 시도하는 젊은 음악인들과 재즈뮤지션들도 록에 관심을 표시, 록 뮤직은 차차 프로그레시브 록, 포크 록, 아트 록, 재즈 록에서 80년대 코스믹뮤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개성이 강한 음악으로 발전해 갔다.

2. 락의 역사

2.1. 1960 ∼ 70년대 – 한국 록의 태동기 (신중현, 한대수, 산울림, 사랑과 평화)
 한국 록의 태동은 1964년 ‘에드 훠(add 4)’의 데뷔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견해이다. 에드 훠의 <빗속의 여인>이라는 블루스 스케일의 곡이 첫 번째 한국 록의 히트곡이다그 후 에드 훠(add 4)의 멤버 신중현은 많은 김추자, 펄시스터즈, 박인수 등을 데뷔시키고 또 성공시켜 대중음악의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는데, 하드록과 소울을 오가는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통해 대중음악의 질적 향상을 도모했다.
 신중현을 이야기 할 때 ‘엽전들’을 빼놓을 수는 없다. 엽전들은 신중현이 조직한 각종 밴드들 중에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케이스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미인>의 기타리프는 지금까지 가장 독특한 구조였다. 엽전들은 1집의 큰 성공에 힘입어 3집까지 발표되지만 2,3집은 신통치 못했고 신중현은 정부의 문화정책에 희생되어 70년대 음악생활을 마감하고 만다. 80년대에 신중현에 대한 규제가 풀려 재기하지만 제2의 엽전들인 ‘세 나그네’의 실패와 함께 대중음악의 1선에서 물러난다. 
신중현이 자생적인 록 문화를 탄생시켰다면 한대수는 김민기로 대표되는 모던포크에 미국적인 록을 유입시킨 케이스였다.

한대수는 미국에서 사진과 음악활동을 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충격적인 공연문화를 이 땅에 선보인 최초의 언더그라운드였다. <물 좀 주소>에서의 한대수의 외침은 혁명이었다. 이미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의 문화로써 자리를 잡아가던 포크에 새로운 경향을 선사한 것이다. 한대수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물 좀 주소>나 <행복의 나라>의 노랫말은 암울한 70년대의 청년문화에서 대단한 상징성으로 자리했고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당시는 70년대였고 군부독재의 문화정책이 있던 시기였다. 심의는 한대수 노래의 상징성에 칼을 댔고 그렇게 이 땅의 록 음악사에 길이 남을 걸작 <멀고먼 길>은 대중에게서 사라진다.

그리고 한대수는 이 땅과 이별을 고하고 70년대에서 자취를 감춘다. 비록 80년대에 <무한대> 앨범으로 다시 컴백을 하고 90년대 다시 그가 주목받고는 있지만 <멀고먼 길>에서 보여준 한대수의 카리스마는 역시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80년대 이후 한 대수의 작품들이 음악적으로는 완성도가 높아졌을 지는 모르지만 포크의 진정한 ‘자유’에 대한 정신은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신중현도 한대수도 우리에겐 안타까운 천재들이다. 우리의 70년대가 그들을 껴안을 수 없었다는 것은 큰 불행이었다. 그들이 끊임없는 창작활동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물음에 답변은 영원한 아쉬움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좌절한 것이 음악 외적인 정치적 현실 때문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겐 크나큰 불행일 뿐이다. 아직도 이들의 작품들 중 대부분이 복각되지도 못하는 현실 속에 이들의 불타는 창작열에 경외감 마저 느껴진다.
‘산울림’ 등장은 신중현과 한대수가 사라진 이후 몹시 새롭고 흥분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산울림 형제들은 음악과는 상관없는 모두 제도권의 최고 교육과정을 이수한 수재들이었다. 대개 대중음악은 계보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70년대를 주름잡던 음악인들이 대부분 신중현과 한번쯤은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산울림은 정말 하늘에서 떨어진 집단임에 틀림없다. 대학가요제에서 <나 어떡해>를 제공한 것이 산울림의 김창훈이었다는 사실도 산울림의 두 번째 앨범에서 <나 어떡해>를 부름으로써 확인된 사실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산울림의 데뷔 음반은 한번도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사운드였던 것이다. 물론 신중현 스타일의 사이키딜릭의 경향이 짙기는 했지만 김창완의 샤우팅과 난해한 건반연주는 정말로 압권이었다. 산울림 1집의 <아니 벌써>는 독특한 김창완의 보컬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건반연주도 매우 일품이었고 <문 좀 열어줘>와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꺼야>등 앨범 전체적인 완성도가 매우 높았다. 1집의 큰 성공으로 연속적으로 3집까지 1년 사이에 발매되는데, 이 모든 창작이 이미 완성된 것들이기에 단기간에 연속적인 명반작업이 가능했다. 2집의 <내 맘에 주단을 깔고>는 산울림 최고의 걸작으로 전주의 기타연주는 정말이지 최고수준이었다. 산울림은 이 후 많은 음반작업을 했지만 사실상 산울림의 최고 작은 3집까지로 봐야 한다. 이후 김창훈과 김창익은 사회생활로 빠지고 김창완은 솔로 프로젝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80년대 한때 삼 형제가 다시 모여 작업을 했지만 예전만 못했다.
산울림과 함께 늘 거론되는 밴드는 ‘사랑과 평화’이다. 산울림이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밴드라면 사랑과 평화는 신중현으로부터 이어져온 계보를 충실히 이행하는 밴드였다. 이미 70년대 최고 테크니션으로 명성을 날리던 최이철 ,송홍섭, 김명곤등의 라인업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멤버였다. 특히 사랑과 평화 1집은 독특한 리듬감에 최이철의 마우스 튜브 연주가 좋은 <<strong style=”padding: 0px; margin: 0px;”>한동안 뜸했었지>가 크게 히트했고 블루스 풍의 <어머님의 자장가>도 인기를 얻었다. 1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곡은 <저 바람>이란 곡으로 독특한 베이스 연주는 너무 훌륭했다.

김명곤의 편곡으로 베토벤의 운명이나 아베마리아등의 클래식 곡이 연주곡으로 실려있는데, 어떤 의도로 녹음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매우 독특한 구성임에는 틀림없다. 사랑과 평화만의 특유의 리듬감으로 새롭게 구성한 클래식 소품들에 대한 느낌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앨범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고려해 본다면 창작곡으로 앨범을 채우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한다. 사랑과 평화는 1집이 큰 성공을 해서 두 번째 앨범작업까지 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해체되었고 80년대에 이남이의 <울고싶어라>가 수록된 3집으로 컴백해서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져오고 있다.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는 정권의 문화정책으로 소멸된 작가정신을 되살린 70년대의 마지막 한국 록의 자존심이었다. 산울림의 음악성은 90년대에 들어 재 평가받고 있는 것은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고 사랑과 평화도 최이철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면서 여전히 최고의 세션밴드로 위치하고 있는 것도 다행스럽다. 이들이 존재하여 80년대 초반 한국 록의 중흥이 가능했고 헤비메탈의 탄생도 가능했다. 신중현과 한대수가 무기력하게 정권의 투항하고 사라진 공허감 속에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가 존재했다는 것은 이 땅의 록 음악사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2.2. 1980년대 초반 – 한국 록의 중흥기 (마그마, 무당, 작은 거인, 동서남북) 
 1978년 개최된 대학가요제는 샌드페버스의 <나 어떻게>(산울림의 김창훈이 만든 곡이다)가 대상을 차지하면서 대중음악계의 신선한 뮤지션의 공급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할을 80년대 초반까지 충실히 이행하여 라이너스, 옥슨80, 활주로, 블랙 테트라 등 대학가의 록밴드들을 주류음악계로 이끌어내는 효과를 주었다. 물론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방송가의 스타메이커로 전락하면서 이제는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80년 대학가요제에서 배출한 ‘마그마’는 80년대 초반 록씬에 가장 주목받을만한 밴드였다.
 <해야>로 대학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은 ‘마그마’는 당시 수많았던 캠퍼스밴드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조하문을 중심으로 멤버들은 영국의 하드록을 정통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했다. <해야>에서의 변박에 이은 기타연주는 비록 이펙터의 부재로 다양한 테크닉을 선보이지는 못하지만 힘있는 조하문의 보컬에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이룬다. 다만 스쿨밴드로서의 위치 즉, 전문 연주인이 아닌 아마추어로서의 어설픔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산울림이나 사랑과 평화등 동시대 최고 밴드와 견주어 볼 때 기타, 드럼, 베이스로 이어지는 하드록의 직선적인 멜로디라인면에서는 우수할지는 몰라도 전체적인 사운드에서는 처지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당시 연세대 재학중인 학생의 신분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마그마의 녹음작업은 단 한 장의 음반으로 그치고 멤버 모두 사회 속으로 흡수된 점이 아쉽다.


 ‘무당’의 경우는 신중현의 정통적인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이 만든 밴드였다. 당시로서는 가장 헤비메탈한 사운드를 보여주는 밴드 중 하나였다. 전설의 기타리스트로 제대로 된 녹음도 없이 80년대 기타리스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중산이 한때 재적했던 밴드이기도 하다. 특히 83년 작인 무당 2집은 사실상 헤비메탈 사운드를 최초로 선보인 음반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헤비메탈의 시조는 85년의 시나위 1집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무당2집에서 최우섭의 기타연주는 헤비메탈의 기타리프와 연주스타일이 무척 흡사하다. 물론 가요적으로 부른 보컬은 아쉬울 뿐이다.

기타연주만 본다면 무당2집에서 연주는 충분히 헤비메탈사운드의 시조라 해도 손색이 없지만 샤우팅없이 얌전하게 부르는 보컬은 힘이 전혀 없었다. 다만 <그 여름을>과 <그 길을 따라> 등에서의 사운드는 매우 훌륭했고 레드제플린의 <모비딕>을 연상시키듯 헤비 드러밍이 일품인 ‘무당’도 좋았다. TV쇼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면서 열심히 활동을 했지만 무당은 2집의 상업적 성과가 그다지 좋지 못하자 해산되고 만다. 80년대 중반 시나위의 불타는 사운드로 헤비메탈이 전성기를 이룰 때 무당이 함께 하지 못한 것은 80년대 록씬의 최고 아쉬움이다. 물론 그들이 있었기에 신대철, 이근형의 헤비기타사운드가 가능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헤비메탈 사운드에 그 누구보다도 먼저 눈을 떳던 무당이었기에 짧은 활동만으로 사라진 무당의 존재가 무척 아쉽다.
 김수철의 화려한 기타로 기억되는 ‘작은 거인’은 두 번째 앨범에서 한국적 헤비메탈사운드에 기틀을 다진다. 기타 연주만으로 볼 때 김수철은 분명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이며 작곡자이다.

김수철 역시 스쿨밴드 출신으로 이미 작은 거인 1집에서 그 가능성을 선보였으며 두 번째 앨범에서는 일본인 엔지니어를 초빙하여 조금 더 나은 음질의 음악을 생산해내었다. 대중적인 <별리>를 머릿곡으로 한 이 앨범의 <새야>에서 하드록 감각은 출중했다. 김수철은 기타리스트로서 신중현에 필적할 만한 훌륭한 기량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작은 거인 2집 이후 록커로서 김수철은 솔로로 전향하면서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라선다. 80년대 최고 발라드 가수로 위치했고 작은 거인 2집의 사운드는 거의 접어두고 오히려 국악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전자음악을 이용한 대작 ‘팔만대장경’을 생산해낸 김수철은 이제 장르를 초월한 거장의 위치에 다다랐음에도 불구하고 못내 아쉬운 것은 작은 거인 2집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 넘치는 기타 연주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이 버클리 유학을 떠나기 전 재적했던 밴드로 알려진 ‘동서남북‘은 98년 시완에서 재발매 되 기전까지 전설 속에 묻힌 밴드였다. 입에서 입으로 명곡 <나비>의 소문으로 인해 80년대 잠시 발매되었다가 사장되어버린 음반이 재발매된 것이다. 그러나 <나비>의 위력에 비해 나머지 곡들은 너무나 평범한 가요 스타일이라는 데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어쨌든 <나비> 단 한 곡으로 동서남북은 80년대 록을 이야기할 때 거론될 가치가 있다. 이탈리안 아트록 이 뉴트롤스의 재해석에 힘입어 90년대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우리의 연주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특히 현란한 키보드 연주는 재즈로 전향하기 이전 김광민의 훌륭한 록 테크닉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주류 음악 속으로 흡수하기엔 다소 난해한 연주였지만 <나비> 사운드는 끊임없이 실험하는 록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80년대의 걸작이다.
80년대 초반은 이 땅의 록음악에 있어서는 중흥기였다. 비록 이렇다할 만한 정형된 사운드는 없었지만 수많은 캠퍼스 밴드가 존재했고 나름대로 완성도 있는 음악을 계속 공급해주었기 때문이다. 철저히 통제되는 신군부의 문화정책에 록은 외면 받아왔지만 점차 FM방송이 전국으로 전파를 타고 부틀랙 음반(소위 ‘빽판’)이 유통되면서 록 마니아층이 두터워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80년대 초반의 상황이 있었기에 85년 이 후 들국화와 시나위라는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2.3. 1980년대 중ㆍ후반 – 헤비메탈의 시대 (들국화, 시나위, 백두산, 부활, 작은 하늘, Rock in Korea)


 1985년 ‘들국화’의 데뷔는 한국 록의 이정표와 같았다. ‘엽전들’ 이후 근 10년 만에 나타난 슈퍼밴드였다. 전인권의 파워보컬은 청중을 압도했고, 조덕환과 최구희의 기타도 힘이 있었다. 최성원과 허성욱의 여성스러움은 들국화의 가치를 배가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들국화의 성공은 단지 음악적인 면에 국한 시켜서는 안 된다. 방송매체를 거의 무시하면서도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위력과 소위 80년대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기폭제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김민기와 신중현으로 대표되는 포크와 록의 계보를 한데 모아 80년대 언더그라운드에 포크와 록이 공존하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을 외치는 전인권의 목소리는 <물 좀 주소>의 한대수에 필적 할만 하고 따로 또 같이에 맥을 잇는 <매일 그대와>에서의 최성원의 목소리도 좋았다. 조덕환과 최구희의 기타연주도 그렇게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느낌이 좋았다. 허성욱의 피아노와 최성원, 전인권의 언발란스한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사랑일 뿐이야>는 베스트 트랙이다. 어떤 날이 리메이크한 진보적인 성향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과 조덕환 작품인 <아침이 밝아 올 때 까지> 그리고 히트한 <행진>과 <세계로 가는 기차>까지 수록곡 모두가 80년대를 대표할 만한 명곡들이다. 비록 전인권과 최성원의 보이지 않는 경쟁에 두 장의 정규앨범을 끝으로 들국화의 역사는 막을 내리지만 80년대 그들의 위치는 80년대 그 자체라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있어 80년대 대중음악은 가능했다.
 ‘시나위’ 1집은 정말 한국 록 30년 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본격적인 헤비메탈 1호 밴드라는 수식어가 늘 시나위에 따라붙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물론 헤비메탈사운드는 ‘무당’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작은 거인’ 2집에서의 김수철의 기타연주도 거의 완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나위가 헤비메탈의 시조라고 불리 우는 이유는 앨범의 완성도에 있다. 시나위 1집을 들어보면 분명 무당이나 작은 거인과 사운드에서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신대철의 힘있는 기타연주에 어우러지는 임재범의 샤우팅 창법은 이미 LA메탈사운드를 섭렵하는 우수성이 있다. 더구나 1983년 작인 무당 2집과 견주어보면 시나위의 사운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당시로선 분명 시나위의 음악은 혁명이었다. 누구나 동경하고 있었지만 이뤄내지 못한 록커의 꿈. 그것이 헤비메탈이었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완벽히 이뤄낸 것이 바로 시나위였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에서 영국의 뉴 웨이브 헤비메탈사운드를 재현했으며, ‘남사당패’의 독창적인 기타리프는 신중현의 대를 잇는 멋진 작품이었다. 물론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에서의 임재범의 보컬은 일품이었다. 그리고 <아틸란타의 꿈>에서는 블랙사바스의 웅장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멤버들이 모두 20대 초반이었다는 점이 더욱 놀라운 사실이었고 시나위는 이후 한국 록을 이끌어 가는 주축밴드로 자리하며 8~90년대 한국 록의 뿌리로서 굳건히 존재해오고 있다.
신대철의 기타는 분명 당대 최고 테크니션임는 틀림없지만 시나위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백두산’의 김도균 역시 독창적인 능력을 지닌 훌륭한 기타리스트였다. 신대철은 임재범, 김종서, 김성헌등 당대 일류 보컬리스트들과 호흡을 맞춰 최상의 주가를 올린 반면 김도균은 유현상과 함께 했다는 점이 불운했다. 어떤 이유에서 유현상과 김도균이 한배를 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백두산 1집에서 유현상의 보컬은 전혀 헤비메탈과 거리가 멀었다. 시나위와 비슷하게 데뷔를 했지만 시나위 1집과 백두산 1집과의 비교는 어불성설이다. 비록 TV쇼 무대에서 웃통을 벗어 재끼며, 연주를 해도 백두산과 시나위의 완성도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물론 시나위는 20대 초반의 멤버로 구성된 반면 백두산은 어느 정도 세션 경험이 있는 중견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연주의 완성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헤비메탈이란 장르에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 앨범에서 백두산의 선택은 유현상의 가성과 영어가사이다. 유현상의 가성 창법은 효과가 있었다. 김도균은 브리티쉬 하드록에 정통한 연주인으로 백두산 2집에서 딥퍼플이나 레인보우의 음악에 뿌리를 둔 연주를 보여주고 있다. 백두산 2집은 김도균의 화려한 기타테크닉을 선보인 작품으로 다소 평가 절하되고 있지만 재음미해볼 필요는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김도균의 화려한 기타연주는 백두산의 틀 속에 어울리지는 못했다. 또한 유현상 역시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보다는 트롯 가수가 더 적합했다. 백두산은 2집 이 후 존재이유를 찾지 못하고 해체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부활’은 김태원과 이승철의 카리스마가 굉장히 강한 밴드였다. 김태원은 The end라는 밴드를 이끌면서 언더그라운드에서 인지도가 높은 기타리스트였다. 이후 김종서와 부활을 만들었는데 앨범 제작 당시에는 김종서가 탈퇴하고 이승철이 보컬을 맡았다. 부활 1집은 또 다른 기타리스트인 이지웅과 트윈 기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보컬리스트 이승철의 영향으로 부활의 음악은 시나위가 보여준 헤비메탈함이 많이 상쇄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게다가 김태원 역시 멜로디 라인을 중시한 연주를 즐겨해서 반복적인 리프를 중시하는 헤비메탈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타리스트 김태원의 테크닉은 최상급이었다. 빅 히트곡 <희야>에서의 종소리나 <인형의 부활>에서 보여준 속주는 분명 절정의 기량이었다. 이승철의 보컬은 샤우팅보다는 R&B적인 테크닉이 뛰어났기 때문에 하드한 록커로서의 역량은 다소 처지는 느낌이었다. 부활은 1집의 대성공으로 ‘회상’을 컨셉으로 한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하는데, 1집보다도 헤비메탈함이 더 많이 사라졌지만 연주중심의 멋진 작품이었다. <천국에서>에서 신디사이져와 함께 한 김태원 솔로 연주는 압권이었다. 비록 상업적인 록이라는 비난도 함께 한 부활이지만 김태원의 기타 연주만큼은 그 어떤 밴드들보다도 훌륭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는 80년대 초반부터 스쿨밴드들이 많이 존재했다. 종로나 이태원 등지에서 소규모 콘서트등에서 활동을 하며 제각기 실력을 뽑내기도 했는데, 당시 기타연주에 있어 양대 라이벌은 신대철과 이근형이었다. 신대철이 아버지 신중현의 후광에 힘입어 시나위로 최초의 헤비메탈의 작위를 얻은 반면 이근형은 뛰어난 실력파였음에도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운한 케이스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근형은 시나위, 백두산, 부활이 이미 휩쓸고 간 뒤에 ‘작은 하늘’로 뒤늦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작은 하늘은 당시 유행하던 LA메탈사운드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시나위가 두 번째 앨범에서 김종서의 목소리로 주가를 올리던 때에 이근형은 비슷한 사운드에 김성헌이라는 신예를 기용하여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과는 시나위의 KO승이었다. 그렇지만 작은 하늘은 이근형의 화려한 테크닉에 김성헌의 파워보컬은 일품이었다. <떠나가야지>와 <깨어진 약속>등에서의 이근형의 필은 역시 최상급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헤비메탈 밴드가 군웅할거하던 당시 상황에서 독창적이지 못하고 LA메탈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은 하늘은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당시 헤비메탈의 기준은 시나위였고 그보다 못하면 그냥 잊혀지는게 당시 상황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은 하늘은 백두산 2집과 함께 80년대 헤비메탈을 이야기할 때 한번쯤 재음미해볼 필요성이 있다. 신대철과 쌍벽을 이루던 이근형의 기타와 임재범, 김종서와 함께 80년대 3대 보컬로 평가받는 김성헌이 함께 한 작은 하늘은 완성도 높은 음반임에는 틀림없다. 이근형은 작은 하늘의 실패이후 시나위 멤버였던 김종서, 김민기, 박현준을 영입하여 카리스마를 조직하지만 역시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해체하고 만다. 또 90년대에는 신성우를 발굴하지만 그렇게 의미 있는 작업은 아니었다. 김성헌은 시나위 3집과 Rock in korea에 참여후 음악계를 떠났다.
86년에서 87년까지는 헤비메탈의 전성시기였다. 수많은 아마추어 밴드들이 결성되었고 또 해체되었다. 고등학교의 스쿨밴드의 활동도 다양했다. 그러나 메이져 밴드인 시나위, 부활, 백두산이 멤버들의 이합집산에 의해 해체나 활동정지 상태에 빠지면서 록밴드의 활동은 크게 위축된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대표적인 밴드가 크라티아와 아랄란쉬이다. 최민수와 이태섭이 이끄는 이들은 LA메탈에서 시애틀 사운드인 쓰래쉬메탈을 받아들인 최초의 밴드들이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음반 한 장 발매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 때 Friday afternoon이란 컴필리언 음반을 통해 헤비메탈의 새로운 사운드가 실험되었다. 이 컴필리언은 세 번의 앨범작업을 하지만 크게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하나의 시도로서 기억된 채 사장된다.
그런데  Friday afternoon 앨범에 기존 메이져밴드의 뮤지션들이 자극을 받아 대형 프로젝트를 구성하는데, 이른바 ‘Rock in Korea’였다. Rock in Korea단순한 컴필리언 앨범이 아닌 여러 밴드들의 멤버들이 헤쳐 모여 형식으로 잼을 구성하여 연주한 독특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80년대 기타리스트의 정신적 지주인 이중산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 80년대 중반 고교 스쿨밴드의 최고 기타리스트였던 손무현과 오태호의 참여도 눈에 띈다. 물론 임재범과 김도균의 콤비는 이후 아시아나 탄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80년대 헤비메탈 최고 명곡 를 완성하였다. 김종서, 김성헌, 임재범 등 3대 보컬리스트들의 목소리를 한꺼번에 비교할 수 있다는 점도 특색이 있다. 비록 신대철, 이근형의 기타가 빠졌지만 김도균, 손무현, 오태호와 이중산의 기타는 80년대를 대표한다 해도손색이 없다. 80년대의 끝자락에서 끝없이 불타던 헤비메탈사운드를 마지막으로 정리한 Rock in Korea는 시나위,부활,백두산의 헤비메틀 1세대의 마지막과 80년대 식의 록음악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4. 1990년대 초ㆍ중반 – 새로운 조류 (이현석, H2O, Next, 서태지, 안치환, 강산에)
80년대식 헤비메탈은 90년 결성된 ‘아시아나’와 ‘카리스마’라는 슈퍼밴드의 앨범작업으로 끝을 맺는다. 이들은 80년대를 호령하던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되었지만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단발적인 작업으로만 만족해야만 했다. 이후 90년대에는 헤비메탈의 2세대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밴드가 스트레인져, 디오너서스, 아마게돈, 더 클럽, 제로지 등이다. 그리고 이들 밴드의 대표주자들인 서안상, 이시영, 안회태 등이 만든 미스테리와 몽키헤드까지가 헤비메탈 2세대로 보면 좋을 듯 싶다. 그렇지만 이들의 활동은 80년대 중반 1세대들의 모습에 비해 그다지 좋은 활동을 보이지는 못했다. 이미 서구의 팝도 헤비메탈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음에도 LA메탈 중심의 활동을 했고 디젤, 터보, 나티, 아발란쉬 등 스래쉬 메틀을 구사하는 밴드들도 메탈리카에 필적할 만한 사운드를 생산하고 있었음에도 대중의 이해부족으로 답보상태에 머물러야만 했다. 어찌되었든 이 당시 실력파로 활동하던 서안상, 안회태, 이시영, 김병삼, 배재범, 임덕규, 김동규 등이 현재 회자되는 인물들이 아닌 것을 보면 90년대 초반 한국 록의 모습은 매우 상황이 좋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비록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여전히 7~80년대 뮤지션들이 추앙 받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말이다.
그러나 92년 말에 발매된 이현석의 음반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미스테리 1집과 함께 메탈마니아의 주목을 받았던 음반으로 기타리스트 이현석의 솔로 프로젝트 앨범이다. 이현석은 80년대 후반 손무현, 오태호와 함께 고교 스쿨밴드의 최고 기타리스트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손무현은 김완선의 작곡자로 오태호는 이승환의 파트너로 모두 제도권으로 흡수되어 버린 뒤, 이현석만이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표현해 내었다. 이현석 1집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기타연주 음반이다. 특히 잉베이 맘스틴의 주도아래 범주화된 바로크 메탈을 구사한 국내 최초의 음반이기도 하다. 기타라는 악기의 각종 이펙터들이 발전하면서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유럽의 기타리스트들을 중심으로 한 기타연주 음반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기타리스트들의 실력을 가름하는 잣대는 다름 아닌 스피드였다. 얼마나 빨리 기타를 연주할 수 있느냐가 바로 기타리스트의 실력이 되곤 했던 것이다. 이현석은 1집에서 속주기타연주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현석 1집은 밴드를 구성하지 못해 기타와 베이스는 직접 연주하고 드럼머쉰과 프로그래밍으로 나머지 부분을 채웠다고 한다. 그래서 사운드면에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기타연주 하나만으로도 멋진 음반이었다. 1집의 반응이 괜찮았는지 2,3집이 계속 제작되었는데 이미 시대는 속주기타를 떠나 얼터너티브 쪽으로 변하고 있어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현석은 90년대 후반에 김경호의 솔로음반에 세션으로 참가하고 최근에 <이현석 프로젝트>라는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H2O’ 2집은 사실상 헤비메탈 시대가 끝나고 모던 록의 시대를 알리는 최초의 완성도 높은 음반이었다. 김준원을 중심으로 한 하드록 밴드였던 H2O가 카리스마의 박현준, 김민기와 시나위 출신으로 베이스와 신디사이저에 모두 능한 강기영을 새로 영입하여 변신을 꾀하였다. 앨범 자켓에서 짧게 정돈된 머리를 보면 이들에게서 80년대 헤비메탈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강기영, 김민기는 가수 ‘봄여름가을겨울’의 라이브에 세션으로 참여하면서부터 이미 헤비메탈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어졌음을 알 수 있었지만 박현준의 세련된 기타연주는 다소 의외였다. U2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깔끔한 리듬기타는 매우 훌륭했다. 전반적으로 볼 때 U2와 폴리스의 스타일을 추구한 듯 싶다. 그리고 1집에서 샤우팅을 하던 김준원도 절제된 보컬을 선보이고 있다. H2O는 경쾌한 하모니커 사운드가 인상적인 <걱정하지마>의 빅히트로 90년대 초반 TV쇼에 자주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H2O는 듀스 2집에 참여하고 듀스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기영, 박현준이 여러 가지 이유로 탈퇴하고, 김민기도 솔로로 독립하면서 해체되고 만다. 해체직전 H2O는 제작사의 계약관계 때문에 3집 <오늘 나는>을 발표하지만 3집에 대한 활동은 없이 해체된다.
여러모로 볼 때 90년대는 80년대보다 이전 세대에 대한 정통성이 뒤떨어지는 시대임에 틀림없다. 80년대 그 뜨거웠던 헤비메탈의 주역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제도권으로 흡수되고 이 땅의 록음악은 90년대 식으로 새로이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성공한 케이스인 ‘넥스트’를 보더라도 그렇다. 물론 리더인 신해철은 80년대 후반 대학가요제를 통해 등장을 한 뮤지션이기는 하지만 그가 몸담았던 ‘무한궤도’ 역시 정통성에는 거리가 멀었다. 신해철은 참 독특한 뮤지션이다. 분명 그는 록에 대한 이해가 보통 뮤지션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해철은 근본적으로 테크노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뮤지션으로 넥스트의 2집에서 4집까지의 활동은 그의 전체 음악 활동에 비춰 본다면 다소 의외성이 강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여름사냥 출신의 기타리스트 정기송과 함께 만든 다소 모던록에 가까웠던 1집 음반과는 달리 스트레인져의 임덕규와 정기송이 번갈아 가며 연주하는 2집은 스래쉬 메탈을 선보여 충격을 주었다.

<이중 인격자>에서의 메가데스 스타일은 놀라웠다. 발라드나 댄스 뮤지션으로 알려져 있던 신해철이 샤우팅을 할 줄은 누구도 몰랐다. 더군다나 이렇게 완성도 높은 스래쉬를 그가 연출해 낼 줄은 정말 몰랐다. 헬로윈사운드를 연상시키는 <껍질의 파괴>의 대곡 스타일도 무척 인상이 깊었고 신디사이져 연주와 철학적인 노랫말이 좋은 <불멸에 관하여>는 베스트 트랙이다. 인지도 높은 신해철이 완성도 높은 스래쉬 매탈을 선보이면서 90년대 록은 장르의 확산을 경험할 수 있었다. 90년대 초반 여러 밴드가 실패한 스래쉬 메탈을 넥스트가 완성하면서 이 땅에는 ‘크래쉬’라는 대형 밴드가 탄생할 터를 만들 수 있었다. 넥스트는 2집의 성공에 힘입어 록밴드로서는 최초로 수많은 지지자를 확보하였고 3집과 4집에는 다운타운 출신 기타리스트 김세황과 감각적인 김영석을 영입하여 안정된 사운드를 선보였다. 4집 라젠카 이후 신해철은 모노크롬으로 그리고 나머지 멤버는 패닉 출신의 김진표와 노바소닉을 결성하여 활동 중이다.
90년대 주류음악을 거론할 때 ‘서태지’를 빼놓을 수는 없다. 서태지는 엔터네이너로서 90년대식 표본을 설정해 주었고 랩과 댄스에 대한 새로운 시류를 개척하기도 했다. 사실상 90년대 주류 음악의 처음과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서태지의 영향력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록을 이야기할 때 랩과 댄스의 귀재인 그가 거론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는 랩퍼이기 전에 록커였기 때문이다. 시나위 4집에서 베이스를 담당하면서 서태지의 프로 음악세계는 시작되었다. 무슨 이유에서 그가 솔로 음반을 준비하면서 비박스와 랩을 첨가하며 백댄서를 거느린 댄싱음악을 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 그의 음악은 보통 댄스하고는 달랐다. 그의 랩은 힙합의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데뷔 곡 <난 알아요>에서 헤비기타리프는 분명 혁명이었다. <하여가>에서 이태섭의 기타 솔로는 스래쉬 메탈의 그것과 일치하였고 3집에서는 마침내 록커의 위치로 돌아서고 만다. <교실 이데아>에서 안흥찬의 목소리를 빌어온 외침이나 <내 맘이야>의 거침없는 지껄임은 록의 저항성과 파괴력을 모두 갖추고 있다. 서태지는 궁극적으로 <발해를 꿈꾸며>나 <널 지우려고 해>에서와 같은 얼터너티브 성향을 추구한 듯 하다. 그것은 4집의 <시대유감>과 <필승>에서처럼 하드코어적인 이미지와 함께 완성되어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이후 발매된 솔로 음반에서는 <컴백홈>같은 힙합요소는 완전히 거세되고 완성도 높은 모던 록을 보여주고 있다. 서태지의 수많은 공적 중에 가장 위대한 점은 록의 제도권화일 것이다. 서태지 이후 대중의 귀는 록에 관대해졌다. 일부 매니아에 국한되었던 록음악이 공중파를 탈수 있었고 90년대 중반이후 시나위의 재결성과 윤도현 밴드의 활동이 가능했으며 인디 록의 탄생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서태지로 인해 주류의 음악이 천편일률적으로 댄스화가 되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결코 서태지의 음악은 ‘댄스를 위한’음악이 아닌 근본적인 록의 정신을 갖춘 음악이었다.
넥스트와 서태지의 열풍에 90년대의 록은 자극적인 성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는 70년대부터 면면히 이어온 포크계의 침체로 작용했고 결과적으로 90년대 초반의 포크는 김광석이 혼자 짊어지다시피 했다. 그와 중에 ‘강산에’의 등장은 신선하고 작은 충격을 주었다. 조용히 발매된 강산에 1집은 소비성향이 짙던 90년대 주류의 정서와는 다소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목소리는 김현식 분위기에 음악 스타일은 들국화의 전인권과 많이 닮아있었다. 한마디로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정서를 제대로 표현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수박>과 <에럴랄라>에서 거침없이 내뱉어내는 보컬은 “그래 노래란 이런 것이야”를 느끼게 한다. 특히 <라구요>의 노랫말과 멜로디는 성인취향에 맞아떨어져 라디오 리퀘스트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강산에는 90년대식 포크 록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이 땅의 록은 그저 강하고 직선적으로만 발전했을 것이다. 강산에의 포크 사운드는 매우 소박하고 정겨웠다. 1집의 성공으로 기획사의 의도가 많이 반영된 두 번째 앨범에서 <너라면 할 수 있어>가 성공하지만 강산에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기엔 너무나 아쉬운 졸작이었다. 그러나 강산에는 3집 <삐따기>와 4집 <연어>를 통해 여전히 훌륭하고 완성도 높은 포크 록을 생산하고 있다. 최근엔 자신의 음악적 모태인 한대수의 음악을 위주로 한 리메이크 앨범까지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80년대식 모던포크는 조동진, 시인과 촌장류의 서정적인 부류와 노찾사를 중심으로 한 메세지 송으로 양분되었다. 그중 메세지송의 대부는 싱어송라이터 ‘안치환’이었다. 노찾사의 주옥같은 곡을 작곡하면서 음악활동을 시작한 안치환은 1,2,3집에서 이전 노찾사의 분위기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의 네 번째 앨범에서는 확연히 사운드를 일신하여 포크로커로서 대 변신에 성공한다. 여전히 가사는 사회 참여적인 메세지가 주를 이루었지만 통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고 목소리도 힘차게 바뀌었다. <수풀을 헤치며>와 <당당하게>는 포크 록으로서 완성도가 매우 높았다. 안치환의 음악의 영원한 화두는 시인 김남주이다. 물론 80년대 대학생 중 김남주의 시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겠지만 안치환은 김남주의 시에 노래를 붙이는 작업을 여전히 좋아한다. 특히 5집에서 <희망은 있다>에 일렉기타 사운드를 입혀 멋진 록을 만들어냈다. 안치환은 현재 여섯 장의 정규음반을 만들었는데, 4,5,6집은 음악적 성향으로 볼 때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것이 좋다. 4집의 포크 록 성향이 점진적으로 완성해 나가는 단계인 셈이다. 특히 5집에서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워>같은 대중성과 음악성을 겸비한 명곡을 생산하기도 했다. 
90년대 한국 록을 거론할 때 넥스트와 서태지 중심의 강렬한 사운드를 거론하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인데, 강산에와 안치환의 포크 록 사운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포크는 이 땅의 대중음악의 한 축으로 포크를 90년대식으로 발전시킨 강산에와 안치환 역시 한국 록 역사에 한 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5. 1990년대 후반 – 그리고 새로운 대안 (크래쉬, 노이즈가든, 이한철, 언니네 이발관, 자우림, GIGS)
 서태지의 등장은 이 땅의 록이 주류 문화 속에 자리잡을 수 있는 원동력을 주었다. <하여가>의 대히트는 이태섭의 화려한 기타솔로를 이 시대 대중의 귀에 적응시킬 수 있었고 <교실이데아>를 통해 안흥찬의 동물적인 보컬도 라디오 전파에 어울림을 주었다. 덕분에 대기업 라이센스인 SKC에서는 헤비메탈 음악에 관심을 기우렸고 전문 메탈 레이블인 메탈포스를 만들었다. 메탈포스는 소위 2세대 메탈 연주인들에 관심을 기우리면서 그 첫 번째 작품으로 수도권 등지에서 독자적인 라이브 활동을 펼치던 신예 ‘크래쉬’를 발굴한다. 물론 메탈리카나 메가데스가 국내에 수많은 메니아를 거느리고는 있었지만 사실 크래쉬의 성향은 국내 환경에 그다지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멜로디를 전혀 무시하는 스래쉬 메탈보다 한 층 더 과격한 데쓰메탈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이 좋았는지 서태지의 <교실이데아>에 크래쉬가 참여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또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콜린 리차드슨이라는 프로듀서를 영입하여 녹음 자체의 질적 향상을 꾀하기도 했다. 데뷔 앨범의 , 와 유일한 우리말 노래인 <최후의 날에> 등은 정말이지 혁명적인 사운드였다. 2집에서는 실험적으로 하드코어를 하기도 했고 3집은 1집의 콜린 리차드슨을 재 영입하고 영국에서 녹음을 하여 완성도를 매우 높였다. 특히 안흥찬의 음산하고 퇴폐적인 보컬에 스래쉬 기타리듬이 돋보이는 <무상>은 압권이다. 비록 94년 데뷔당시에는 애송이에 불과하고 운이 좋아 메탈포스와 서태지의 영향으로 성공한 케이스로 절하되기도 했지만 이젠 크래쉬의 안흥찬은 국내 최고의 뮤지션으로 성장했다.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스래쉬, 데스메탈뿐만 아니라 하드코어와 테크노까지 장르 확장을 꿈꾸고 있는 안흥찬의 노력이 있는 한 크래쉬의 혁명은 계속될 것이다. 
90년대 후반 가장 완전한 헤비메탈사운드를 구사하는 밴드를 꼽는다면 단연 ‘노이즈가든’이다. 윤병주의 화려한 테크닉과 박건의 파워보컬은 단연코 현존 밴드 중 최고이다. 사운드가든이나 엘리스 인 체인 등의 카피밴드에 불과했던 노이즈가든은 톰보이 록페스티벌에 참가해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프로 음악세계에 데뷔했다고 한다. 노이즈가든 사운드의 핵은 역시 윤병주의 기타에 있다. 윤병주 기타의 매력은 물론 화려한 테크닉에도 있겠지만 독특한 톤에 있다. 기타리스트의 능력 중에는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사운드 메이킹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 면에서 윤병주는 국내 몇 안 되는 독창적인 톤을 지는 연주가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기타연주만 놓고 볼 때 노이즈 가든의 1집과 시나위 6집이 90년대 음반 중 최고작으로 뽑는다. 1집에는 90년대를 대표할 만한 명곡들이 많이 실려있는데, 특히 점층적인 구성이 돋보이는 <유혹>이 베스트이다. 최근 발매된 2집은 윤병주 기타 톤을 더욱 확고히 했고 새로운 시도로 세기말 최고의 화두인 테크노에 대한 접근이 눈에 띈다. 이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지속적인 활동이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이미 밴드의 이합집산으로 인한 음악의 붕괴를 80년대 헤비메탈에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던 록의 새로운 시도로는 ‘델리 스파이스’와 ‘이한철’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김민규, 윤준호로 구성된 델리스파이스는 1집을 통해 모던 록의 가능성을 충분히 시험해 보았다. ‘노캐리어’와 ‘차우차우’가 FM전파를 탈 수 있었고 또 완성도도 매우 높은 성공작이었다. 또 이들에게서 중요한 점은 한국식 모던 록의 완성이다. 물론 H2O 2집에서부터 모던 록 스타일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서태지와 넥스트를 거치면서 다소 모던록의 대중적 이해가 크지 않았는데 델리 스파이스의 완성도 높은 음반작업으로 인해 후배 밴드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후 등장하는 인디 록 밴드들에게 음악적 방법론을 제시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델리 스파이스는 99년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하는데 녹음의 완성도에서 1집을 압도한다. 단연코 99년 최고 음반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꽉 찬 기타 사운드와 뛰어난 편곡력이 돋보인다. 반면 이한철은 델리스파이스보다 먼저 등장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철저히 무시된 안타까운 뮤지션이다. 대학가요제를 통해 등장했고 걸죽한 사투리의 입담으로 토크쇼에 출연하면서 음악성이 평가절하된 불운아이기도 하다. 영화제목을 이용한 1집은 당시 유행하던 얼터너티브를 차용하였으나 ‘델마와 루이스’가 조금 주목받다 말았다. 96년에는 두 번째 앨범 <되는 되는거야>라는 걸작을 발표했지만 왠일인지 대중매체는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이한철 2집은 90년대 베스트 앨범중 하나이다. 신해철이 참여하기도 한 2집은 레게와 테크노를 기반으로 한 훌륭한 펑크록 음반이다. 특히 <애니멀>에서의 변박과 레게의 조화에서 보이는 이한철의 리듬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음악 파트너 장기영과 최근에 ‘지퍼’의 음악을 조직해서 역시 훌륭한 음악을 선보이고 있지만 왠일인지 미디어는 자꾸만 그를 외면한다. 
‘언니네 이발관’의 아마추어리즘은 90년대 최대의 성과물인 인디 록의 탄생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노이즈가든의 윤병주가 프로듀싱해서 완성한 언니네 이발관 1집은  유치한 팀 이름에 재켓 디자인까지 아마추어 냄새가 많이 난다. ‘푸훗’으로 시작되는 음악도 기타를 조금만 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저건 나도 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할 줄 알면 해봐”라고 대답할 줄 아는 뮤지션들이었다. 경력 1년 미만의 멤버들이 창작한 열두 트랙의 곡들은 테크닉에서 유치할지는 몰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경>의 기타 아르페지오나 <쥐는 너야>의 베이스 드러밍 그리고 <산책 끝 추격전>의 사이킬릭적인 이미지 등은 곡 구성의 승리였다. 각각의 곡들도 작사, 작곡 식의 일률적인 명시가 아니라 각각 파트의 구성을 담당한 사람을 명시함으로써 앨범작업이 멤버의 공동작업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음악적인 완성도를 떠나 참으로 곡들의 구성만큼은 신선했다. ‘푸훗’이 인기를 얻고 네티즌을 중심으로 세인의 관심을 받자 두 번째 음반을 제작하지만 1집에서의 신선도는 많이 사라졌다.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려고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마추어 정신으로 무장했던 1집의 구성력은 사라지고 솔로연주가 늘어 2집은 개인적으로 실망을 많이 했다. 아마도 이러한 아마추어적인 음반은 단발적인 작업을 끝을 맺는 것이 더 좋았을 것만 같다.
90년대 이 땅의 록음악에서 최대의 화두는 역시 인디록이다. 저예산 독립음반을 의미하는 인디록은 홍대 앞의 록카페 ‘드럭’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드럭의 고정출연 밴드인 크라잉 넛과 옐로우 키친의 녹음작업을 저예산으로 하고 거창한 홍보나 마케팅 없이 공연장 등지에서 앨범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인디록의 시작이 되었다. 인디록의 주된 장르는 펑크록이다. 아무래도 저예산이기 때문에 앨범제작에 있어 걸림돌이 많이 없기 때문에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기 때문에 아마추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펑크가 인디록의 주류 장르로 정착할 수 있었다. 드럭이 ‘아워 네이션’이란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음반작업을 하면서 크라잉 넛이나 노 브레인 같은 밴드 대중에게 익숙하게 되었고 재머스, S&H, 블루데빌 등 많은 클럽에서 수많은 실력파 아마추어가 등장하게 되었다. 단군이래 가장 많은 밴드가 결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홍대 앞 클럽가는 호황을 누렸다. 이들 인디밴드들 중에 주목할 만한 밴드를 꼽으면 허클 베리핀, 노브레인, 레인리 선, 미선이, 토스트, 새드 리전드 등이 있다. 특히 최근들어서는 메이져 레이블을 통해 <인디파워 1999>라는 컴필리언 음반이 제작되는 등 메이저로의 등극도 눈에 띈다. 그리고 장르도 펑크에서 테크노와 하드코어 심지어 힙합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점차 인디록도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정착되는 느낌이다. 이는 상당히 바람직한 것으로 아마추어들의 무대와 음반작업을 적은 예산으로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은 향후 이 땅의 대중음악에 질적 향상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90년대 후반에 기존 뮤지션들의 활동으로는 ‘시나위’와 ‘봄여름가을겨울’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10주년 기념음반에서 기존의 재즈와 블루스 위주의 음악에서 복고적인 록 사운드를 선사하는데, 많은 후배 뮤지션이 참여해서 완성도를 높여 주었다. 신대철이 이끄는 시나위의 활동 재개는 상당히 의미있는 행보였다. 시나위의 재결성은 신대철이 손성훈의 솔로 음반을 프로듀싱하면서 알게된 뮤지션들과 의기투합해서 재 결성되었다. 4집의 실패와 함께 80년대 헤비메탈 시대가 끝나면서 시나위도 함께 사라졌다. 블루스 록 밴드 ‘자유’를 결성하기도 한 신대철은 결국 자신의 음악의 본류인 시나위의 이름으로 다시 컴백했다. 손성훈과 함께 한 5집은 시대적 영향으로 그런지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화려한 신대철의 테크닉이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당시 그런지 스타일의 연주도 거의 독보적이었다. 그 뒤, 김바다를 새로운 보컬로 영입하고 제작한 6집은 시나위 2집 이후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명반이다. 노이즈가든 1집과 더불어 90년대 최고의 록 음반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예전 시나위에 비해 현실 참여적인 가사가 일단은 눈에 띄고 블루스 필을 기반으로 한 얼터너티브 사운드는 잘 다듬어져 있다. 김바다의 보컬도 걸죽하고 퇴폐적으로 매력이 있었다. 현재는 70년대 사운드를 재현하는 7집 ‘사이키델로스’를 발표하고 80년대 이루지 못한 일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잦은 멤버 교체로 시나위의 정통성을 본다면 오히려 김종서 밴드(김종서, 김영진, 김민기 등 기타를 제외한 부분이 모두 전 시나위 멤버들이다.)보다 현 시나위가 처질지는 모르지만 시나위의 실질적인 주체인 신대철이 이끄는 시나위는 분명 80년대부터 이어져오는 한국 록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요즘 활동이 주목되는 밴드는 ‘자우림’과 최근 앨범을 발표한 ‘GIGS’이 있다. 자우림은 이미 석 장의 앨범을 발표한 중견밴드의 위치에 있다. 홍대 앞 클럽밴드들 중 가장 성공한 밴드가 자우림이다. 현재까지 언더와 오버의 경계선을 가장 잘 활용하며 양쪽의 지지세력을 나름대로 확보하는 유일한 밴드이기도 하다. 사실 산울림 카피밴드에 불과했던 자우림은 여성 보컬 김윤아를 영입하면서 많이 성장을 한 밴드이다. 여성 보컬으로서의 카리스마는 허클베리핀의 남상아나 솔로 활동을 하는 황보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김윤아는 자기 색이 강하다. 그렇지만 김윤아의 보컬만으로 자우림이 이뤄졌다면 벌써 팀이 깨졌을 것을 텐데 다행히 자우림엔 이선규라는 좋은 기타리스트가 포진하고 있다. 이선규의 기타는 산울림 트리뷰트에 실린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에서 상당히 진한 인상을 주었다. 멤버 전원이 프로그래밍에 참여하여 <밀랍천사 No 9>와 등에서 좋은 결과를 주었다. <나비>라는 대중적인 멜로디도 겸비한 자우림의 앨범은 역시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겸비한 다목적용으로 완성도가 높다. 
‘GIGS(긱스)’는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한상원, 정원영 밴드의 실체이다. 포스트 서태지의 대표주자인 패닉의 이적을 맞이하고 윤도현 밴드 출신의 강호정이 보강된 GIGS는 세기말 최후의 슈퍼밴드이다. 유학파의 대명사 한상원과 정원영은 분명 이 시대 최고의 테크니션이다. 그리고 신예 정재일과 이상민은 이미 패닉 3집과 정원영의 솔로 음반등에서 탄탄한 기본기를 선사한 바 있어 더욱 기대를 하게 했다. 아직 음반이 발매된지 얼마 되지 않아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만 GIGS의 완성도는 최고이다. 특히 슈퍼밴드의 최대 단점인 멤버의 솔로 연주를 극도로 절제하고 팀웍을 중시한 플레이가 맘에 든다. 기타연주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최고 테크니션인 한상원에 감성적인 건반연주자 정원영이라면 그 네임밸류에서 기막힌 솔로 경쟁이 있을 법도 한데, 전혀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새로운 세기에 GIGS는 이 땅에 대표적인 밴드로 손색이 없을 듯 싶다. 80년대 뮤지션 한상원, 정원영, 90년대 뮤지션 이적, 강호정 그리고 다음 시대를 대표할 재목감인 정재일, 이상민이 결합한 GIGS. 그들의 활동이 벌써 기대된다.

락음악 소개, 락음악의 이해, 유명한 락밴드

포크 음악이란 무엇인가?

영원한 포크 음악

추모 분위기에서 각광을 받은 노래들은 과거 민주화 투쟁 시절에 시위대가 노래한 운동권 가요들이 많지만 음악적으로 분류하자면 포크(Folk)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그 동안 전파에서 외면당한 포크가 댄스음악이나 ‘후크 송’을 누르고 홀연히 부상한 것이다. 아마도 신세대들한테는 모처럼 포크 음악의 진정성과 접하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포크 음악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  | 이즘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후 높이 타오른 추모 열기를 반영한 노래들은 이전의 음악과는 판이했다. 영결식 후 노제에서 불려 전 국민을 울먹이게 한 해바라기의 「사랑으로」, 안치환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윤도현의 「후회 없어」와 「너를 보내고」 등을 어찌 소녀시대의 「Gee」,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 슈퍼주니어의 「쏘리 쏘리」와 비교할 수 있으랴. 역시 노제 때 양희은이 부른 「상록수」는 라디오 방송 횟수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상록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캠페인 때 기타를 치며 불렀으며, 취임식장에서도 불렸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새삼 국민의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추모 분위기에서 각광을 받은 노래들은 과거 민주화 투쟁 시절에 시위대가 노래한 운동권 가요들이 많지만 음악적으로 분류하자면 포크(Folk)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그 동안 전파에서 외면당한 포크가 댄스음악이나 ‘후크 송’을 누르고 홀연히 부상한 것이다. 아마도 신세대들한테는 모처럼 포크 음악의 진정성과 접하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포크 음악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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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사실 국내에서도 포크는 19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세대에게는 주요 음악 문법으로, 당대의 김민기, 양희은, 송창식, 윤형주, 김정호, 어니언스 등이 부른 노래는 모두 포크송이었다. 1980년대에는 학생 시위대와 노동 현장에서 불리는 운동권 가요의 바탕을 이루는 동시에 남자 듀엣 해바라기가 말해주듯 주류에서도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가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이후 음악의 주도권이 랩과 댄스음악으로 넘어가면서 급속도로 퇴조하면서 젊은 세대와 멀어졌던 것이다.

포크는 한마디로 민중 음악이다. 민초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 구전되어 불린, 매스 미디어 이전의 ‘민요’인 것이다. 우리한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미국의 포크는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19세기에 싹터서 광산과 철도 노동자들 사이에 구전 가요로 발전했다. 미국의 백인 민요라는 점에서 컨트리음악과 혼동되기도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우선 1940년대 현대화한 포크 즉 모던 포크(Modern Folk) 소생의 선구자라고 할 리드벨리(Leadbelly)부터가 흑인 블루스맨이라는 점이 그 단서다.

만약 미국 백인의 민요를 컨트리음악이라고 하고, 흑인의 민요를 블루스라고 할 때 컨트리와 블루스는 곧 포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모던 포크 단계에 들어오면서 컨트리나 블루스와는 다른 별도의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민중의 의식을 직설적인 노랫말로 표출하면서 컨트리 또는 블루스와 경계선을 긋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포크가 컨트리의 흐름과 흑인 블루스의 맥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밥 딜런(Bob Dylan)

리드벨리와 함께 공연하기도 한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는 모던 포크 형식이 정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두 사람은 1950년대에 미국의 구전가요 채집은 물론, 창작 포크를 시도해 포크의 부흥기를 열었다. 모던 포크란 바로 구전 가요 전승 단계에서 벗어나 그 기초 속에서 새로이 쓰인 포크를 말한다. 구전 가요로서 포크는 작곡자가 상당수 미상이지만 모던 포크는 작곡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어서 피트 시거(Pete Seeger)가 있던 그룹 위버스(Weavers)와 「Tom Dooley」, 「Green back dollar」로 1950년대를 석권한 3인조 킹스턴 트리오(Kingston Trio)는 포크를 널리 대중화한 그룹이었다. 하지만 포크가 갖는 고유한 성격인 프로테스트(protest), 즉 ‘저항’적 성격 때문에 ‘좌파’ 음악으로 낙인찍히는 고초를 겪었다. 포크가 통기타에다 하모니카를 부른 단순한 구조라는 것은 그만큼 노랫말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 노랫말에 왜곡된 시대와 현실을 담아 저항성을 드러내면 보수층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밥 딜런(Bob Dylan)과 존 바에즈(Joan Baez)는 1960년대 케네디 대통령 집권기와 시점이 맞물린 모던 포크의 대중화에 결정적이고 지대한 역할을 했다. 특히 밥 딜런은 포크의 위대한 전설로서 대중음악사에서 영국의 비틀스와 더불어 절대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밥 딜런의 노래들은 지구촌 대학생과 지성들을 ‘저항의 띠’로 엮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포크에다가 비틀스가 들고 온 로큰롤을 결합한 포크 록(Folk rock)을 창시해 1960년대 전 세계 청춘의 음악적 코드로 정착시켰다.

조니 미첼(Joni Mitchell)

우리에게는 누구보다도 인기가 높았던 사이먼 앤 가펑클을 비롯해 버즈, 「California dreaming」이라는 곡으로 유명한 마마스 앤 파파스, 영국의 도노반은 모두 밥 딜런의 영향 아래 포크 록을 구사했다. 1970년대 초반 일제히 등장한 싱어송라이터들, 예를 들어 조니 미첼, 캣 스티븐스, 주디 콜린스, 돈 맥클린, 제임스 테일러도 모두 밥 딜런의 포크에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 작곡가 겸 가수를 의미하는 싱어송라이터의 음악은 대체로 포크인 경우가 많다.

반전과 인권 운동을 중심으로 부상한 포크는 하지만 1975년 월남전 종전 후에는 저항의 대상이 사라지면서 힘을 잃었고 1980년대 중후반에는 브루스 스프링스틴, 트레이시 채프먼, 수잔 베가 등이 맥을 이어갔으나 대세를 장악하지는 못했다. 한국에서 포크는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 20년 간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뜨와 에 무와, 라나에 로스포, 트윈 폴리오 등 낭만적인 포크와 한대수,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등의 비판적 포크가 함께 1970년대 초반 개화해 청년들 모두가 통기타를 들었다.

1970년대에는 김정호, 송창식, 이장희, 이정선, 조동진 등이 다양한 포크 스타일을 전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고, 정태춘과 함께 1980년대에는 상기한대로 노래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1999년 한국 포크 30주년을 맞이해 일각에서 공연과 음반을 통해 포크 부활의 기치를 들어 올렸으나 힙합과 록에 젖은 신세대들에게 그 숨결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포크가 부활할지 여부는 국내 음악계의 지속적인 관심사이기도 하다.

<포크의 영원한 명곡들>

1.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 Pete Seeger
꽃은 어디로 갔나? 아가씨가 땄고 아가씨는 청년한테로 갔고 청년은 전쟁터로 끌려가 무덤에 묻혔고 거기서 꽃은 핀다는 지극히 윤회(輪回)적 내용이지만 실은 반전의 메시지다. 원래 오랫동안 구전되어온 민요를 피트 시거가 채집, 새로운 가사를 붙여 1964년 음반으로 발표했다. 포크의 영원한 클래식!

2. Blowin’ in the wind – Bob Dylan
1963년에 발표된 반전(反戰)가로, 이 노래 하나로 밥 딜런은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저항의식을 일깨웠다. 국내에서도 「바람만이 아는 대답」으로 번안되어 여러 가수들이 부른 비판적 포크의 고전이다.

3. Like a rolling stone – Bob Dylan
통기타 음악에 머물던 포크가 전기기타와 드럼 즉 록을 만나 ‘포크 록’ 유행의 계기가 된 기념비적인 곡. 20세기의 어떤 책, 영화, 미술 작품보다도 젊음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노래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록 전문지 『롤링스톤』 2004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0곡’ 조사에서 이 곡을 당당히 1위로 선정했다. 1965년 전미 차트 2위를 차지했다.

4. River in the pines – Joan Baez
‘여자 밥 딜런’으로 불린 존 바에즈의 여러 곡 가운데 국내에서 유독 사랑받은 1965년도 곡.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로 제목이 번안되었다. 아름다운 멜로디이지만 메리와 결혼한 찰리라는 남자가 급류에 휘말려 죽은 구슬픈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에서 애청된 존 바에즈의 다른 노래로는 「Donna donna」와 「우린 승리하리라」로 번안된 「We shall overcome」이 있다.

5. El condor pasa (If I could) – Simon & Garfunkel
원래는 18세기 페루의 민요를 폴 사이먼이 영어 가사를 붙여 개작했다. 국내에서는 「철새는 날아가고」로 번안되어 1970년대 라디오를 완전 잠식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1970년 마지막 앨범 에 수록되어 있다. 애상조의 아름다운 선율이 압권이다.

6. California dreaming – Mamas & Papas
1960년대, 영국에는 비틀스가 있다면 미국에는 마마스 앤 파파스가 있다고 할 정도로 영국에 눌린 미국의 체면을 살려준 그룹이다. 통기타의 낭랑한 포크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정제된 포크, 이른바 포크 팝을 구사했는데 우리에게도 엄청난 사랑을 받은 이 곡이 대표적이다. 1966년 4위에 올라 골드 레코드를 기록했다.

7. Heart of gold – Neil Young
히피 이미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닐 영은 캐나다 출신으로 1945년생이다. 하모니카와 통기타 사운드가 인상적인 이 곡은 1972년 발표되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변하지 않는 숭고한 마음을 갈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8. American pie – Don McLean
8분이 넘는 긴 곡이지만 1972년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는 빅히트를 거두었다. 이제 음악계에 순수성이 사라졌음을 개탄하는 듯한 내용이지만 정확한 의미 파악은 쉽지 않다. 마돈나(Madonna)가 2003년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돈 맥클린의 또 다른 명곡은 같은 앨범에 수록된 빈센트 반 고흐 헌정 곡 「Vincent」다.

9. Bird on the wire – Leonard Cohen
캐나다의 음유시인으로 수년 전 캐나다 언론이 나서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대하자는 제안을 했을 만큼 캐나다에서 추앙되는 인물이 레너드 코헨이다. 낮은 음조로 세상의 혼탁과 부조리, 소외를 묘사하는데 「전선 위의 참새」로 번안된 이 곡도 마찬가지다. 1990년 멜 깁슨과 골디 혼이 주연한 영화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10. Talkin’ bout a revolution – Tracy Chapman
1980년대에 포크의 부활을 알린 흑인 처녀 트레이시 채프먼의 대표곡은 1988년 데뷔 앨범의 「Fast car」지만 포크의 진정성은 같이 수록된 이 곡에 있다. 흑인 차별이 여전했던 미국 사회에서 혁명을 얘기하자는 포크의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곡이다.

글 / 임진모([email protected])
락음악 소개, 락음악의 이해

록의 역사

ROCK.그 파란의 역사록의 역사, 락의 역사

1 태동기

1.1 미국의 Rock’n’Roll

Rock’n’Roll의 등장을 알린 것은 1955년 Bill Haley & Comets가 영화 Blackboard Jungle의 주제가인 Rock Around The Clock이란 노래를 크게 히트시키게 되면서 부터이다. 그는 원래 컨트리 가수로 출발한 사람으로 54년 Shake, Rattle And Roll이란 노래로 록큰롤 가수로 전향하게 된다. 그의 Rock Around The Clock은 R’n’R이라는 새로운 젊은이들의 음악을 전 세계적으로 알렸고 빌 헤일리의 뒤를 이어 Chuck Berry의 Maybelline, Little Richad의 Tutti Frutti, Fats Domino의 I’m A Man이 계속 적으로 히트하게 됨으로써 록큰롤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록큰롤 붐을 더욱 불붙인 것은 바로 Elvis Presley의 등장이었다. 빌 헤일리가 최초의 백인 록큰롤 스타였다면 엘비스는 최초의 10대의 우상이었다. 56년 Heartbreak Hotel 히트로 순식간에 젊은이들의 스타가 된 엘비스는 당시 10대에게는 가수 이상의 존재로 자리잡으며 원조Idole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당시 기성세대들은 록큰롤이 불량스런 음악이며 폭력적이고 성도덕을 어지럽히는 것이라 여겼으며 자식들이 엘비스를 열렬히 좋아하는 것마저도 싫어했다. 왜냐하면 미국은 청교도 국가의 도덕이 살아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무척 보수적이었다.이에 TV는 그의 허리놀림이 섹시하다고 해서 그의 하체를 비춰주지 않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56년 엘비스는 Heartbreak Hotel을 필두로 Don’t Be Cruel, Hound Dog, Love Me Tender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록큰롤의 인기를 불붙이게 된다. Bill Haley의 Rock Around The Clock의 전세계적 히트와 엘비스의 등장에 의해 록큰롤은 달콤한 발라드풍의 팝송을 제치고 인기차트를 누비게 되었고 50년대 젊은이들의 생활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록큰롤이 점차 그 기반을 잡아감에 따라 새로운 타입의 가수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가수는 Buddy Holly였다. 그는 초창기의 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록큰롤을 팝적인, 그러면서도 친해지기 쉬운 사운드로 바꾸어놓으며 보다 세련된 록큰롤을 들려주게 되었다. 이러한 스타일의 록큰롤은 어떻게 보면 상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초기 록큰롤 스타일을 유지해주고 있었다. 어쨌든 버디 홀리는 57년 That’ll Be The Day를 히트시키며 데뷔해서 그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게되는 59년 2월 2일까지 수 많은 곡들을 히트시키며 많은 가수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컨트리와 R&B의 영향이 두루 받았던 R’n’R은 역시 그 영향들이 잔존해 있었다. 40년대부터 R&B가수로 활동하던 Fats Domino는 55년 Ain’t A Shame의 히트 이후 록큰롤계에서도 활약했는데 그가 만들어내는 R’n’R 사운드는 R&B분야, R’n’R분야 양쪽에서 모두 호평받을 정도로 R&B의 전통을 잘 살린 록큰롤을 구사했다. 또 록큰롤의 선구자였던 척 베리나 리틀 리차드 역시 R&B적인 성향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초기시절 R&B를 기초로 한 록큰롤을 보여줬다. 특히 이들 둘은 이러한 R&B의 기초아래 척 베리는 록 기타의 기본을 확립했고, 리틀 리차드는 피아노를 두드려대며 흥분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록큰롤에 있어서의 샤우트(SHOUT) 창법을 정착시키며 Rock 음악의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이 외에도 비록 록큰롤 가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Platters, Sam Cooke, Ray Charls등의 R&B 가수들이 – 꼭 R&B 가수라고도 말 할 수는 없다. – 록팬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록큰롤 중에서도 컨트리의 색깔이 짙은 록큰롤을 로커빌리라 불렀는데 Jerry Lee Lewis는 그 대표적 주자였다. Carl Perkins 역시 제리 리 루이스에 버금가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부드러운 보컬과 여유있는 리듬을 중심으로 한 음악을 구사해 강한 비트와 스트레이트한 보컬 위주의 록큰롤과는 다른, 또 하나의 흐름을 주도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굳이 로커빌리 가수로 불리지는 않았으나 Ricky Nelson이나 Everly Brothers의 음악 역시 컨트리 색깔이 짙었다. 특히 에벌리 브러더즈는 뛰어난 코러스 하머니로 후일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갓 태어났던 록큰롤은 다듬어지지 않았고 폭력적인 면도 있었지만 여러 형태의 가수들이 등장하고 많은 노래가 만들어지는 동안 세련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선 달콤한 발라드 분위기의 록큰롤, 바꿔말해 팝화된 록큰롤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Paul Anka, Neil Sedaka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Singer-Songwriter의 선구자였는데, – 평론가에 따라서는 비틀즈를 싱어송라이터의 시초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 누구나 쉽게 친숙해질 수 있는 곡들을 만들어내며 팝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새로운 조류에 밀려 척 베리나 리틀 리처드 등의 정통적이고 하드한 록큰롤 가수들은 차츰 인기챠트로 부터 멀어져가고 있었는데 엘비스가 군입대로 거의 활동을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가속화 되었고 더구나 59년 2월 버디 홀리가 사망함으로써 50년대 말에는 조용한 분위기의 록큰롤이 유행하게 되었다.

1.2 영국의 Rock’n’Roll

영국의 R’n’R은 미국에서 탄생한 록큰롤을 수입해 그것을 재생산해내는 과정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사운드를 탄생시켜나가게 된다. 영국의 록큰롤이 미국의 록큰롤을 수입해서 생겨난 것이기는 하지만 록큰롤이 전세계적으로 히트하기 이전부터 영국에서도 역시 록큰롤로 향한 새로운 음악적 움직임이 등장한다. 바로 Skffle이 그것이었다. 이것은 원래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즈에서 발생한 흑인음악의 일종으로 딕시랜드 재즈의 모태와도 같은 음악이었다. – 앞서도 흑인들이 초기에 탬버린이나 빨래판 같은 것들을 사용해서 음악을 연주했다는 언급을 한 바 있다. 바로 그것이 바로 이 Skiffle이다. – 이러한 음악은 1940년대 영국에서 뉴올리언즈 재즈의 리바이벌 붐이 일어났을 무렵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50년대에 켄 커리어즈 재즈맨 & 스키플 밴드라는 그룹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에 이른다. 이렇게 스키플이 점차적으로 주목받자 영국의 스키플은 Lonnie Donegan이라는 수퍼스타를 한명 탄생시킨다. 이것은 1956년 초의 일로서 로니 도네건의 등장 이후 영국에는 수백개의 스키플 그룹이 잇달아 탄생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영국은 영국만의 독특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40년대 뉴올리언즈 재즈 리바이벌은 스키플이란 활동 외에도 영국의 재즈 활동 자체를 활성화 시켰다. 그런 움직임의 주축이 되었던 것은 트래드 재즈였다. 조지 웨브 딕시랜더즈는 그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밴드였고 프레디 랜돌은 수 많은 추종자들을 낳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을 바탕으로 영국의 대중음악은 재즈적인 분위기를 중심으로 흐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영국에서 강세를 보였다 하더라도 팝계의 주류는 록큰롤이었고 재즈적인 분위기로 물들었던 영국의 대중음악계에서의 록큰롤이란 새로운 음악은 젊은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너무도 충분했던 음악이었다. 따라서 5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록큰롤 스타들이 배출되는데 그 중 영국내에서 엘비스와 같은 영향력을 가진 가수로 Cliff Richard가 등장하게 된다. 클리프 리차드는 버디 홀리식의 록큰롤을 구사했는데 당시 영국의 록큰롤의 흐름은 미국에서의 강렬한 이미지 보다는 경쾌하고 깔끔한 멜러디위주의 음악이 강세를 보이며 영국 나름대로의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나타나게 된다.

지금까지 록 음악의 발생과정을 록큰롤의 탄생인 50년대 이전의 상황부터 살펴보았다. 자료부족으로 상당히 부실하지만 초기ROCK이 어떻게 탄생되었는가에 대한 감은 잡았으리란 생각이 든다.이 당시의 음반은 대단히 구하기가 어려운데 다행히 ‘영원한 연인’앨비스의 음반들은 지금도 쉽게 구할 수 있으므로 꼭 사서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2 발전기

50년대 첫 걸음마를 내딛은 Rock’n’Roll은 새로운 음악세계의 개척자들에 의해 그 기틀을 마련한 시기였고, 60년대에 들어 더욱 심화되고 발전되어가는 과정에서 Rock음악의 진정한 기반이 마 련되었다. 이러한 60년대의 다양하면서도 심도깊은 음악의 발전과정을 통해 60년대말에서 70년대 초에 이르는 록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현존하는 모든 형태의 Rock이 60년대 형성된 음악양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역시 60년대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사실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1960년대는 수 많은 그룹들의 혁명적 발자취가 남겨진 시대였으며 현대 대중음악의 기본적 틀이 완성된 시기였다.

2.1 Rock의 성장기 60년대

1960년대초 미국 대중음악계의 두드러진 움직이라면 50년대 말부터 붐이 일어난 팝화된 록큰롤의 붐, 트위스트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댄스 뮤직 붐, 주로 동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Bob dylan, Joan Baez등에 의한 Folk Music의 붐, Beach Boys, Jan & Dean등에 의한 Surf Music 붐 등을 들 수 있다.

현대 포크뮤직의 귀재였던 Bob Dylan이나 Jon Baez를 중심으로 한 포크 붐은 정치색이 짙었던 것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붐이었다고는 하지만 관계가 없는 붐이었다. 포크계로부터의 인기차트 진출은 Peter, Paul & Mary라든가 Kingston Trio정도가 해내고 있었는데 이 두 그룹은 Bob Dylan이나 Joan Baez만큼 과격하지는 않았다. Blowin’ In The Wind가 일반대중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Peter, Paul & Mary가 부르고나서 부터였지만 그들이 부르는 Blowin’ In The Wind는 이미 프로테스트 송(정치가요)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에 의해 밥 딜런의 이름이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지게되었다. (밥 딜런이 차트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더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포크 뮤직과는 달리 인기차트에 자주 등장하던 것은 앞에서도 말한 50년대 말부터의 록큰롤, 서프뮤직, 트위스트등이었다. 특히 서프음악은 60년대초 미국 십대들을 열광시켰다.포크가 뉴욕을 중심으로한 East Coast(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번져 나갔다면 서프음악(서핑이 변형된 말.해변음악)은 항상 맑고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는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West Coast(서부)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서프음악은 이러한 지역적 배경을 바탕으로 해변에서 느낄 수 있는 젊은이들의 낭만을 50년대의 록큰롤에 기초를 둔 즐거운 사운드에 담은 것이었다. 서프음악 붐의 주역은 Beach Boys와 Jan & Dean였는데 그들의 음악의 가장 큰 특색은 50년대의 록큰롤에 기초하고 있었지만, 특유의 코러스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60년대초는 베를린 장벽문제나 흑인폭동문제등의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며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는 침체일로를 걷던 시기였다. 포크 뮤직이 이러한 사회분위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정면으로 맞섰다면, 서프 뮤직은 태양과 파도와 자동차와 여인을 표사한 단순한 가사로 당시의 사회에 도피처가 되었다.(비치 보이스의 음반은 쉽게 구할 수 있으므로 들어보기 바람.그 유명한 SURFIN`USA가 이들의 곡이다.)

50년대에 영국의 젊은이들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록큰롤에 열광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라디오방송의 부족으로 큰 발전 없이 외모와 보컬 중심의 음악인들 뿐이었고, 게다가 이들은 미국식으로 이름을 바꾸거나 미국음악을 모방했다. 이때 등장하여 가장 오랜동안 성공을 거둔 음악인은 Cliff Richard와 Tommy Steel등이며, 당시의 걸작으로는 Johnny Kidd & The Pirates의 Shakin’ All Over, Shadows의 Apache등이 전해진다. 그러나 60년대부터 영국의 음악인 중에서 – 미국의 음악을 연주하며 시작했지만 – 자신들의 독자적인 음악을 미국으로 역수출하는 재능인들이 등장했다. 이때 미국에서도 리틀 리처드, 척 베리, 제리 리 루이스,또한 엘비스 프레슬리 조차도 침체기에 빠져있을 때인데, 영국에서는 지금까지 듣지 못하던 음악을 갖고 등장한 것이다. 소위 British Invasion(영국의 침략)으로 일컬어지는 이 현상은 The Beatles, Rolling Stones, Animals로 대표되었으며 이들의 음악은 삽시간에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때는 도시마다 로컬클럽과 로컬밴드가 인기를 얻던시기로 이런 분위기를 Beat-Boom이라고 불렀다. 동시에 R&B와 Mods Fashion의 영향까지 겹쳐서 힘이 넘치는 새로운 사운드가 환영을 받았다. 결국 앞서 언급한 브리티쉬 인베이젼의 선두주자 중에서 비틀즈는 모즈 패션과 Pop-Rock이, 롤링 스톤즈와 애니멀즈는 모즈 패션과 블루스록이 결합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들은 외모에서부터 혁신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요란한 옷차림이 유행했었다.화려한 색깔과 하늘거리는 옷들을 입고 연주를 했다.) 1963년부터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그룹들이 등장한다. Who가 데뷔하고, The Kinks, Yardbirds, Dave Clark Five, Manfred Mann등이 활약했다. 특히 킹크스는 리더인 레이 데이비스를 중심으로 풍자적인 앨범과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여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에 커다란 영향을, 데이브 클락 화이브는 올갠과 색소폰으로 무거운 연주를, 맨프레드 맨은 재즈와 블루스까지 결합시킨 자유로운 연주법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 시기에 중요한 사실은 이들 대부분의 그룹들이 영국내에서 일기 시작한 블루스 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브리티쉬 블루스 록이라 불리우게된 이 음악의 역사는 50년대초로 거슬러 올라가, 런던의 한 블루스 클럽에서 Cyril Davis와 Alexis Korner가 만남으로 시작된다. 이 두사람은 그후 8년동안 함께 팀을 이루어 활동을 하다가 Blues Incorporated를 조직하여 활동한다. 한편 블루스 인코퍼레이티드에서 분리된 그룹 Graham Bond’s Organisation(’63)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래엄 본드는 거친 목소리에 최초로 해먼드 올갠, 멜로트론을 사용한 실험주의자다.)이 그룹 출신으로는 후일 크림의 멤버로 활약하게되는 Jack Bruce, Ginger Baker등이 있다. 시릴 데이비스, 그래엄 본즈에 이어서 브리티쉬 블루스 록을 상징하는 네명중의하나인 John Mayall이 등장한 것은 바로 직후의 일이다. 이러한 블루스 록은 영국 언더그라운드 록의 주류를 이루며 60년대 새로운 실험정신의 기틀을 마련하게된다.

1965년부터는 영국, 미국 대중음악계에 사회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밥 딜런이 프로테스트 송을 들려주면서 더욱 강한 표현과 자유로운 표현을 위해 포크와 록을 다리 놓은 업적을 이루어내었다. 그는 앨범 Another Side Of Bob Dylan을 시작으로 Bringing It All Back Home에서 포크록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포크록의 등장 이후 Byrds나 Mamas & Papas등이 성공을 거두며 포크록은 웨스트코스트록을 대표하는 음악이 되었다. 따라서 60년대 중반에는 포크 넘버를 록 비트로 처리하는 독특한 음악을 간판으로 내걸고 성공을 거두게 되는 그룹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포크록의 붐은 월남전쟁을 소재로 사회에 대한 비판을 실은 프로테스트 송인 Eve Of Destruction을 배리 멕과이어가 히트시킴으로써 절정을 맞았으나 이 작품은 프로테스트 송이 주목받기 시작한 풍조에 편승한 상업주의적인 속셈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라 하여 비난을 받는등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사실, 당시 포크록의 인기에 편승해 이전의 포크 넘버들을 매끄러운 사운드로 새로 포장하여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는 음악적 풍조가 등장하는등 포크나 포크록의 근본적인 정신이 많이 퇴색되어 갔다. 이러한 경향에 반발하여 Byrds나 Lovin’ Spoonful같은 그룹들은 각기 독자적인 음악영역을 개척해갔다. 예를 들면 버즈는 인도음악과 재즈에서 소재를 얻어 라가록이나, 스페이스 록(우주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음악)을 만들어냈고, 러빈 스푼풀은 랙타임을 시초로하여 미국의 전통적인 음악을 록으로 만드는 등, 각각 팝스의 영역과 관계를 갖는 참신한 실험을 시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크록의 붐과 함께 대중음악계에 사회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한다. 이 당시 주된 메시지는 베트남전, 생활에의의 환멸, 편집증, 환각제였다. (性 해방은 이미 R&B 작품들에서 은유적으로 다루어져왔다.) 특히 환각제가 널리 만연되어서 종교적인 그림, 찬송가, 예식등이 도입되고 비치 보이스의 실험적인(?) 사운드가 환영받는다. (60년대 중반에 들어서 비치 보이스는 필 스펙터의 Wall-Of-Sound라는 새로운방식의 엔지니어방식의 영향으로 새로운 전자악기의 도입과 입체적인 화음의 구사등의 새로운 시도를 하며 60년대 웨스트코스트 록계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싸이키델릭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전주곡적인 경향이었으며, 이 시기 신비주의를-죽음의 상태를 넘어선 극한의 무아경, 해체정신, 도시에서의 탈출, 호모섹스와 변태성욕, 프리 섹스등-앞세운 Velvet Underground의 파격성이 대중들에게 환영받으면서 언더그라운드 록은 이제 록신의 전면에 자리잡게 되었다.

1967년 사이키델릭의 영향으로 Flower Power(히피문화)가 만연되고, 실험적인 스타일, 과장되고 익살스런 스타일, 자유분망한 스타일이 뒤섞인 음악으로 전후 최고의 황금기를 맞는다. 또한 이러한 음악들을 뒷받침할 레코딩 기술의 혁신기도 함께 도래했다. 사이키델릭은 66년부터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유행된 음악형태로, 그 특징으로는 환각제와 함께 사용되는 자유로운 음악, 긴 솔로연주, 재즈와 동양적인 사운드가 결합된 실험성, 현실참여보다는 도피적인 음악등으로 정의된다. 특히 록계에서는 최초로 나름대로의 예술(Art)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이다. 사이키델릭 뮤직이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텍사스주의 오스틴 지역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텍사스대학 주변이다. 이 지역에서는 60년대부터 장발, 환각제, 남부 특유의 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 13th Floor Elevators라는 그룹이 등장하여 포크록과 초기 펑크를 기조로 하는 최초의 사이키델릭 뮤직을 들려준다. 그후 65년부터 Jefferson Airplne, Frank Zappa, Company, Country Joe & The Fish등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67년으로 제퍼슨 에어플래인이 Somebody To Love로 60년대말의 사랑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컨트리 조 & 더 피쉬의 정치적인 유우머, Rock의 장벽을 깨버린 후랭크 자파의 불협화음과 풍자, 그레이트풀 데드의 실험적인 시도와 함께 전개되는 서정적이면서도 힘찬 서사시, 그리고 라이트 쇼(화려한 조명을 통한 환각상태를 조장)가 이때에 모두 개화되었던 것이다. 특히 사이키델릭 음악과 함께 대중문화는 더욱 정치적, 사회적인 기능을 갖게 되었다. 거리에는 꽃과 청바지, 장발, 환각제로 가득찼고 젊은이들은 자유와 평화와 사랑을 외치며 활보하였다. 사이키델릭 음악의 영향력은 대단해져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대거 노출되기 시작하고, 프로그레시브 록을 탄생시켰으며 녹음기술과 포크록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 시기 Doors의 등장과 1회 몬테레이 팝 페스티발을 통해 지미 헨드릭스와 제니스 조플린이 등장한 것은 향후, 록의 발전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이키델릭의 영향으로 이제는 언더그라운드는 록신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데, 비틀즈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롤링 스톤즈는 Their Satanic Majestics Request, 그레이트풀 데드는 Anthem Of The Sun을 출반하여 환각제의 경험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환각제의 경험과 자유로운 표현을 위해서 당시로서는 전자기술의 응용이 가장 시급하게 되었다. 롤링 스톤즈의 작품이 모조품으로 낙인찍힌 반면에 비틀즈는 기념비적인 앨범을 남기게 되었다. 비틀즈의 앨범 Sgt. Pepper’s- 는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을 명프로듀서로 부각시켰고 록 앨범을 이제는 감상용의 단계로 끌어올렸다. 특히 A Day In The Lufe는 멜러디와 오케스트레이션과 시적인 언어가 결합되어 훌륭한 예술을 이루어내었다. 이것은 문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흐름’을 나타낸 것으로 앨범 전체가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전개되는 Concept Album의 효시가 되었다. 사이키델릭 사운드가 점점 복잡하고 다양해질수록 레코딩 기술도 점차 진보하게 되었는데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공연에서 전자기술을 시도하였고 종합적인 불협화음 사운드로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던가 그레이트풀 데드가 키보드와 퍼커션과 목소리등 여러 소리를 결합하는 시도등은 이러한 레코딩 기술의 진보를 반영하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실헙적인 음악이 계속되는 동안 출현한 프로그레시브 록은 가장 큰 환영을 받는다. 초기 시절 Moody Blues, Procol Harum, Pink Floyd등이 등장하며 프로그레시브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60년대의 가장 큰 특징 두가지는 실험성과 다양성이라 말할 수 있다. 1967년 이전의 음악이 실험성의 시대였다면 이러한 실험성을 바탕으로 1968년부터는 다양성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특히 Woodstock Rock Festival은 다양한 60년대의 음악을 총망라한 음악축제였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1969년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뉴욕의 베델에서 열린 공연으로 영국의 Isle Of Wright Festival과 함께 60년대말을 수놓았다. 정치적 사회적인 참여로 특징지어진 60년대의 록 음악이 이 시기로 넘어 오면서 개인화되고 내면화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모두 각자의 개성을 추구하였고 뮤지션과 청중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많은 장르의 록 음악이 등장하게 된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Love, Peace & Music이라는 60년대의 대표적인 슬로건을 실현하였고 60년대 록이 화려하게 꽃피운 행사였다.

2.2 PSYCHEDELIC 이란 무엇인가?

60년대의 록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사이키델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반드시 이해해야한다.미국에서는 배트남전에 대한 회의가 만연되면서 현실도피적인 경향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퍼지게된다.그에따라 젊은이들은 마약을 하게되고 환각을 탐미하게 되기까지한다.그 결과 환각은 락의 성장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고 갖가지 다양한 음악이 탄생하게 된다.이에따라 환각문화는 60년대 이후의 락에도 오랬동안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먼저 사이키델릭이라는 ‘음’의 감각을 서술하기 위해선 ‘음’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기존적인 가치가 필요하고 이러한 취지에서 기존의 사조를 중심으로 고찰해 보겠다. 우선, 신비주의라고 하는 사조가 있었다. 이것에 궁극의 진리는 주관적으로만 알 수 있다는 설이며 그 일환으로 정적주의라고 하는 사조가 있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도 그 정도에 따라 다양한데 이성에 대하는 말로 어떤 것에 대한 주관적인 쾌, 불쾌의 감정을 나타내는 Feeling. 애정, 공포, 슬픔, 기쁨 따위의 강한 느낌을 나타내는 Emotion. 이성에 대한 애정이나 격렬한 노여움따위의 강렬한 감동으로 종종 이성적인 판단을 압도하는 Passion. 어느정도의 사고나 이성이 따르는 고상한 또는 따스한 감정을 나타낼 때 쓰는 Sentiment등으로 그 다양한 감정적 표현을 들 수 있겠다. 여러 사조는 또한 이러한 다양한 감정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며 분화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다른 사조로 관능주의라는 것이 있느네 이것은 철학적으로는 감각론, 미술적으로는 육감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해석은 두가지이며 첫째는 시각, 청각의 미적 관능과 촉각,미각,후각의 저급관능에 감각을 일으키는 감각기관의 작용, 둘째는 육체적 쾌감을 느끼는 감성적인 흐름으로 이루어진 사조가 있는 반면 이성적 판단의 우울성에 의해 형성된 금욕주의가 있었다. 이것은 육체적, 감성적, 세속적인 욕망을 억눌러서 도덕의 이상을 달성하려는 주의로 키니크학파, 스콜라학파등의 주장에 의했었고 카톨릭에서는 수덕주의라고 한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에 있고 도덕은 이 목적을 실제화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쾌락주의와는 정반대의 사조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세상이 싫어져서 삶의 보람을 느끼지 않고 이를 부정하는 인생관 염세주의. 그와는 정반대인 낙천주의등 그 사조가 다양했었다.

사이키델릭은 바로 윗부분과 같은 사조들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각색하여 ‘音’으로 표혀했다는것이 대체적인 관점이고 또한 이러한 의식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마약류의 물질을 흡입했음은 물론이다. 음이 이성,감성에 던지는 충격은 대단히 큰 것으로서 기존의 가치와 해석을 글로 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사이키델릭의 정의를 내린다면 ‘음’과 ‘빛’의 조화.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식을 표현한 사상을 담은 음과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여러가지 색채와의 조화가 합쳐져 현대적 감각의 사조에 맞게 변형 발전시킨 문화사조가 곧 사이키델릭인 것이다. 지금까지 사이키델릭을 기존의 사조를 통해 살펴봤다. 그럼 이번엔 좀 더 구체적으로 사회론적인 토대에서 마련된 현실적 측면의 시이키델릭, 즉 우리가 직접 접근해 도달할 수 있는 음악(사이키델릭 록)의 생성과정 그리고 영향을 통해 나름대로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자. 사이키델릭 음악이 최초로 태동한 곳은 물론 미국이다. 60년대 중반 미국은 케네디 암살에 따른 국론분열과 점차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국가에너지 소모등에 의해 안팍으로 사회,문화적인 격동기를 맞이했다. 기존의 윤리적 관념에 대한 재고, 신종 이데올로기의 엄습, 경쟁적 사회질서에서 오는 괴리등 단순한 의식적 격변에서 극한의 해체정신에서 오는 무분별한 이성으로 점차 정치색 짙은 과격성으로 치달렸다. 이로인해 사람들은 점차 복잡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했고 이러한 때 마약은 자연스러운 길잡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마약류의 Acid Trip(환각 여행)체험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즉, 환각제를 복용했을 때 일어나는 환각, 환청의 이미지를 록 음악속에 표현한 음악이 바로 사이키델릭 록이며 음악의 형태는 블루스 록, 포크 록을 근본으로 인도음악의 선율을 가미한 일종의 다변적이며 절충주의식 음악이다. 사이키델릭 사조가 파생된 곳으로 두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샌프란시스코의 Haiht Street과 Ashbury Street이 교차하는 Haiht Ashbury District로 이곳은 약물실험으로 시작된 사회적인 의식혁명이 발생된 지역이다. 특히 이곳은 30년대부터 마약의 유해, 무해를 가지고 큰 논란을 빚었는데 60년대 중반을 전후해 LSD(1943년 호프만에 의해 발견된 환각제의 일종) 연구가인과학자 오즐리 스탠리의 지도하에 하이트 애쉬베리의 주민 켄키지(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원작자)등이 LSD의 약물실험을 한것이 동기가 되어 이에 샌프란시스코의 여러 뮤지션이 적극 동조함으로써 전 서부지역으로 파급되었다. 그중 제퍼슨 에어플래인, 퀵 실버 메신저 서비스, 그레이트풀 데드 등은 샌프란시스코의 초기 사이키델릭 뮤직을 이끌었으며 그룹 이름 자체도 환각적인 내음이 짙었다. 다른 한 곳은 텍사스주의 어스틴 지역이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텍사스 대학 주변이다. 장발, 환각제, 인도풍의 의상 그리고 남부 특유의 전원적인 기질등이 합쳐져 하나의 풍속으로 정착되었고 그 지역그룹인 13th Floor Elevator의 독특한 음악과 함께 동부지역으로 파급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사이키델릭 록이 추구하는 내용도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종교적, 관념적 세게에서 인간사의 불협화음, 소외계층의 사회적 존재부각, 정치적인 유우머, 그리고 도시생활의 환멸, 편집증, 완전하고 자유로운 性해방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 다양한 성격을 띠었다. 이와같이 사이키델릭 록은 기존의 사조와 새로이 파생된 이념을 합쳐 ‘음’이라는 실체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후 거대하고 종합적인 문화사조로 발전되며 또한 LSD의 급속한 보급으로 인해 이에 관련된 새로운 형태의 예술문화가 등장하게 된다. 그중 오버헤드의 환각적 정신 분석학과 색채를 혼합한 라이트쇼나 사이키델릭 아트등, 일종의 전위예술이 그것이다. 이후 사이키델릭 사조는 대중들과의 통일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나름대로 사회적 의식을 반영하는 척도로서 한 시대의 문화예술을 찬란하 꽃 피웠다. 이처럼 음악은 영화처럼 사회,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따라서 음악을 단순한 음의 향유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의 이해를 위한 하나의 자료로 삼는것도 무방하다 하겠다.

2.3 히피문화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가 처한 세계의 관습과 도덕, 법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 어떤 인간은 그것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인간은 좀 더 그러한 외부적인 틀에서 탈피해서 자유로와지기를 원하며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그러한 상태에서 가지게되는 자유와 환희에 있다고 보고 그런 방향으로 가려고 노력한다. 후자의 인간들의 경우 전통적 권위와 기성세대가 구성한 사회적 조직과 불화가생기게 된다. 따라서 탈피를 시도하는 인간들은 적극적인 반항과 불신감을 가지고 기성세력과 맞부딪히기도 하고 소극적인 경우에는 자기들의 공간과 세계인의 침묵으로써 묵묵히 탈피의 시도를 행하기도 한다. 적극적인 형태로는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나 노동자, 농민들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사회주의자들을 통해 나타난다. 그들은 소극적인 저항으로는 늘 사건이 일어나고 분쟁이 끊이지 않는 복잡한 세계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뚜렷이 보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 목숨을 던져서까지 적극적인 저항을 보인다. 소극적인 형태로는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히피들의 문화와 행위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궁극적인 탈피에서 가치를 찾는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기성권에 저항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런 저항은 일시적인 목적 – 즉 세상의 관심 -을 이룰수는 있어도 영우히 자기들이 추구하는 세계를 이루어 그것을 정착시킬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어찌보면 인도의 명상가나 라마교 승려의 고립된 생활과 흡사하게 소극적이고 개인적으로 혹은 작은 집단을 형성해 자기들의 가치를 추구해나간다. 그러한 것에 지금 당장은 몰라도 차츰 많은 동조자들이 나타날 것으로 그들은 보는 것이다.또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자기들 공통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작은 세계를 이루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형태로 히피들은 이 세계에 나타났다. 이러한 소극적인 저항이 사회에 어떤 집단으로 보여지게 되고 대중음악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의 일로서 히피 문화와 60년대의 록의 연관성등을 살펴본다면 60년대의 록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히피문화는 미국에서 발생되었다. 땅이 넓은 나라, 물질문명의 대표적인 나라, 정신적인 문화가 깊지 못하고 역사가 길지 못한 나라, 이러한 나라인 미국에서는 어떤 편한 제도적 장치나 물질적 만족이 있는 반면 정신적으로 뭔가를 찾으려는 이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또 땅이 넓어 나름대로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도 히피문화가 생성된 배경이다. 또한 가장 법이 잘 정비되어 있는듯 하나 허술한 것이 미국이란 것도 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젊은 지식인들, 대학생들이 히피문화에 동조적이었고 나아가서 예술인들 가운데에서 동조하는 입장을 보인 이들이 많았다. 그것은 그들이 미국이 갖고 있는 문제점, 즉 정신적 빈곤과 세계의 큰 문제 해결에서 오는 국민과 정부와의 갈등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히피 문화세력이 갖고 있는 현실불만의 표현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 배경으로 60년대 말에 이르러서 점차 사회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히피문화는 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60년대의 미국은 2차대전의 승전국으로서의 승리감의 시대(40년대)와 그런 승리감과 보수주의 물결을 등에 업은 안위의 시대(50년대)를 보낸 시기였다. 세계 제1의 국민의 힘으로 세계평화를 수호했다는 긍지가 정치가나 국민들에게 팽배해 그것이 물질적 풍요로 상징되는 미국의 생활과 결부되어 대부분의 미국민은 50년대를 만끽했고, 정치상황 역시 미소 강대국의 냉전으로 동서진영이 분리되어 별 말썽없이 지났고 예술가는 전위,현대 예술이나 미국인 특유의 리얼리즘으로 만족스런 생활을 표현했고, 젊은이들은 미국인이라는 강한 긍지속에서 정치와 기성세대의 온화한 가운데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60년대초 월남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인은 부담스러운 짐을 스스로 지게 되었다. 사소한 전쟁으로 보고 공산주의에게 미국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뛰어들었던 월남전이 그들에게 회의와 불안, 거부, 반항의 동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미국인의 세금으로 미국군이 뛰어들 월남전에서 월남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무지로 패배하기 시작하자 미국내에서는 참전 찬반양론이 거세게 일어났고 정치가의 무능이 드러났으며 보다 중요한 것은 젊은 세대간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부는 국가의 체면으로 이미 시작된 전쟁을 이기려는 의도로 계속 전쟁을 이어가려고 했고 국가권력의 강제에 의해 자의던 타의던 전쟁터로 끌려가는 젊은이중 많은 사람이 비판적으로 월남전과 미국정부를 보았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또 월남전을 다루는 국가권력의 실체속에 위선과 모순이 느껴져 비판의식과 회의감을 느낀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평화를 전쟁터로 끌어들이는 정부를 비난했고 데모가 미국 전 대학에 펴졌다. 학생들 사이에는 스스로의 권리와 요구를 당당히 해야한다는 자각의식이 팽배해졌고 이런 반항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는 결국 패배한 전쟁을 지속시켰고 젊은이들은 평화를 내세우며 반전구호를 외쳤다. 어떤 젊은이들은 소극적인 저항으로 기성세대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었고 사랑과 평화만이 있는 세계를 자기 스스로 찾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또 다른 측면은 안위와 만족으로 이어지는 미국인의 생활에 허점과 모순을 느낀 젊은이들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풍요에의 갈증을 느꼈으며 물질적 풍요에 만족하는 기성세대와 유리감을 느꼈다. 어떤 젊은이는 록큰롤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했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정신적 갈증을 메우려고도 했으며 자신의 생활을 버리고 의기투합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방황하거나 어느 곳에 정착하여 생활한 소수의 무리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60년대 중반부터 강하게 나타나 사회문제로서 이들의 반항과 도피를 심각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통해 히피는 탄생했다. 히피는 사랑과 평화를 외치며 현실사회의 모순을 지적했고 프리섹스나 약물복용등과 같은 과격성을 통해 기성세대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히피의 모습은 사이키델릭 문화와 맞물려 60년대 록의 주된 주제가 되었던 순수한 사랑, 절대 자유등에 영향을 끼치며 60년대 록의 사상적 면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히피문화는 음악뿐 아니라 60년대의 미국사회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세계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잘 알아둬야 하겠다.다시한번 말하지만 음악을 포함한 인간의 문화라는 것은 그 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자신의 음악을 찿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음악의 뒷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3 록의 절정과 쇠태기 그리고 현재까지의 변화

60년대의 비약적 발전을 통해 록음악은 그 예술적 기반을 탄탄히 다지게 된다.따라서 70년대 초반에는 다시는 재현되지 않은 록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된다.하지만 70년대 들어서 록의 정치성이 사라지고 미학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져 사회와의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에 어떤이들은 록의 진정한 전성기를 60년대 후반으로 보기도 한다.하여간 70년대는 뛰어난 많은 그룹들을 통해 록이란 꽃이 가장 만발한 시대였고 또 빨리 시들어버린 시기이기도 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60년대 후반의 불안했던 사회는 차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고 따라서 변혁의 음악인 록음악도 슬슬 시들어가기 시작했다.사람들은 어렵고 강렬한 음악보다는 편안한 음악에 자신을 내맡기기 시작하고 록의 입지는 줄어든다.70년대 초반의 왕성한 실험정신은 음악계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을 상업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사라져갔다.이에따라 초반기에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던 록은 차차 단순해져 가는데, 그 중 대표적인 모습이 하드록이다.사람들은 간단하면서도 화끈한 것을 원했기때문에 하드록이 득세하게 된다.이러던 중 70년대 후반에 펑크록이 혜성같이 등장한다.무사안일하게 흘러가던 主流록에 반기를 들고 엄청 파격적인 정치성을 무기로하여 당시 대중음악계를 휘저어 놓는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회보수층의 반발에 의해 아주 짧은 생에를 마치게 된다.하지만 잠들어 있던 펑크록은 90년대들어 얼터너티브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 현 음악계를 주도하고 있다. 80년대로 접어들어 감각적 댄스 음악에 의해 거의 고사 직전에까지 이른 록은 또다른 변신을 시도하게 된다.하드록 음악이 더욱 거칠어져 해비매틀이라는 록의 극단적 모습을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초반에는 다소 언더그라운드적 성격으로 소수의 지지층만을 얻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기가 더해져서 80년대 중반부터는 주류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90년대 초반에는 데스매틀이란 초극단의 음악까지 탄생시키면서 승승장구하지만 대그룹들의 잇다른 침몰로 다소 인기가 떨어지져 다소 세력이 약해진다.이때 펑크의 또다른 이름인 얼터가 등장하여 지금까지 큰 인기를 얻고있다.어떵게 보면 초반의 정치성에서 70년대에 미학을 추구한 후 80년대에 힘을 추구하고, 어쩌면 목표가 없어진 지금 세기말적 불안에 의해 초반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음악을 또다시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로서 록의 역사를 대충 살펴보았다.너무나도 방대한 록 음악을 한 편의 글로 정리하기가 무척 힘들었다.그래서 후반부가 무척 부실한 졸고가 되었다.이점 양해바란다.

4 록계의 거인들

이 부분에서는 록의 본격적 이해를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슈퍼그룹들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다.

4.1 BEATLES

63년에 데뷔한 이들은 초창기에는 청소년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귀여운 R&R사운드로 앨비스 이후 가장 큰 인기를 얻는 아이돌 밴드로 그 역사를 시작한다.65년부터는 초기보다는 더욱 세련되고 약간의 사회성을 표출하는 음악을 행하면서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서서히 음악성을 나타내면서 음악계를 주도하게 된다.67년 록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SGT,PEPER`S LONELY HEARTS CULB BAND 음반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이때부터 다양한 실험성을 보여준 이들은 해산때까지 뛰어난 걸작들을 남기게 된다.이들의 업적은 참으로 대단한데 우선 록의 태동기에 다양한 실험으로 록의 활성화를 꾀했고,그들의 삼업성에 음악성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필청음반- HELP!,REVOLVER,WHITE ALBUM,ABBEY ROAD

4.2 LED ZEPELIN

69년 그룹 야드버즈의 후기맴버였던 지미 페이지에 의해 결성된 그룹으로 초창기에는 블루지한 하드록을 중심으로 음악을 시작한다.잠시 포크록적 경향을 보인 후 4번째 음악에서 위대한 음악성을 표출한다.이후로도 걸작들을 발표하면서 60년대의 비틀즈를 이어 70년대의 황제로 군림한다.이들은 블루스를 기반으로한 하드록을 하면서 록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게 된다.이러한 탐미적 성향때문에 후에 펑크록 그룹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한다. 필청음반- VOL1,VOL4,PHYSICAL GRAFFITY,

 THE SONG REMAINS THE SAME

4.3 PINK PLOYD

67년 데뷔한 이들은 록에서 가장 독특한 모습을 보였던 프로그래시브록 그룹중 최고의 밴드이다.초창기에는 사이키델릭을 기반으로한 스페이스록(우주적 분위기를 표현)과 아방가르드(매우 실험적인 음악)를 하면서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한다.70년부터 좀더 록적이면서 짜임새 있는 컨셉트 앨범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73년 비틀즈의 SGT,PEPER 음반이후 가장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THE DARK SIDE OF THE MOON 음반을 발표하면서 대중적 인기도 획득하게 된다.이후로도 걸작들을 발표하다가 79년 대작 THE WALL 음반을 발표하여 다시한번 음악계를 놀라게 한다. 필청음반- 그들의 83년 이전의 모든음반

4.4 JIMY HANDRIX

67년 그룹 EXPRIENCED 를 결성하면서 혜성같이 등장하여 당시 록계를 놀라게 한다.그는 천부적인 기타리스트로서 다양한 기법들로서 록 기타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그는 기타를 자신의 몸이 된것처럼 연주하면서 강렬한 록음악으로 음악계에 혁명을 가져오지만 아깝게도 70년에 약물중독으로 사망하게 만다. 필청음반- 그의 70년 이전의 모든음반

4.5 DEEP PURPLE

68년에 데뷔한 이들은 초창기에는 다소 프그래시브한 음악성을 보이며 입지를 굳혀가다가 70년 뛰어난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의 가입으로 변모하여 하드록 그룹이된다.이후 하드록계를 이끌어가면서 수많은 록커들이 거쳐가게 되고 또 이들이 그룹을 결성하면서 하드록 전성기를 만들어 내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한마디로 하드록의 전설이다. 필청음반- IN ROCK,MACHINE HEAD,MADE IN JAPEN

4.6 METALLICA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매틀그룹으로서 83년에 데뷔하여 거친 매틀의 맛을 보여준 후 서서히 음악의 틀을 잡아가게 되어 86년에 MASTER OF PUPPETS 음반을 발표하면서 스래쉬 매틀을 완성하게 된다.88년에 4집을 발표하면서 중후하면서도 사회적인 음악으로 매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는다.이들이 매틀을 이끌어가면서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청음반- RIDE THE LIGHTING,…AND JUSTICE FOR ALL

4.7 MEGADETH

70년대의 레드 제플린과 딮퍼플처럼 80년대를 매탈리카와 함께 이끄어나갔던 그룹이다.85년 데뷔하여 가능성을 보여준 후 차차 완성도들 높여가다가 90년에 RUST IN PEACE 로서 지적인 스래쉬를 완성한다.이들의 사운드는 데이브 머스테인의 카리스마적인 지휘아래 현란한 기타와 복잡한 구성,그리고 매우 사회적인 가사말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완성도로서 매탈리카와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밴드이다. 필청음반- PEACE SELLS…BUT WHO`S BUYING?,RUST IN PEACE

4.8 NIRVANA

89년 힘있는 데뷔앨범으로 주목받다가 91년 혁명적인 음반 NEVERMIND 로서 엄청난 충격과 함께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어 얼터너티브 음악이 90년대를 주도하도록 만든그룹.얼마전 커트 코베인의 죽음으로 그 역사는 끝났지만 그 이름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