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음악 소개, 락음악의 이해

한국 락 밴드의 역사

1. 락의 정의
초기 로큰롤(rock’n’roll)이 차차 ‘R&R’의 약자로 표시되다가, 더 축소된 록(rock)으로 고정된 명칭이다. 록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60년대 초인데, 이 무렵 록 뮤직은 초기 로큰롤과는 표현양식이나 내용 면에서 예술적으로 세련되기 시작하여, 전위음악을 시도하는 젊은 음악인들과 재즈뮤지션들도 록에 관심을 표시, 록 뮤직은 차차 프로그레시브 록, 포크 록, 아트 록, 재즈 록에서 80년대 코스믹뮤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개성이 강한 음악으로 발전해 갔다.

2. 락의 역사

2.1. 1960 ∼ 70년대 – 한국 록의 태동기 (신중현, 한대수, 산울림, 사랑과 평화)
 한국 록의 태동은 1964년 ‘에드 훠(add 4)’의 데뷔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견해이다. 에드 훠의 <빗속의 여인>이라는 블루스 스케일의 곡이 첫 번째 한국 록의 히트곡이다그 후 에드 훠(add 4)의 멤버 신중현은 많은 김추자, 펄시스터즈, 박인수 등을 데뷔시키고 또 성공시켜 대중음악의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는데, 하드록과 소울을 오가는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통해 대중음악의 질적 향상을 도모했다.
 신중현을 이야기 할 때 ‘엽전들’을 빼놓을 수는 없다. 엽전들은 신중현이 조직한 각종 밴드들 중에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케이스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미인>의 기타리프는 지금까지 가장 독특한 구조였다. 엽전들은 1집의 큰 성공에 힘입어 3집까지 발표되지만 2,3집은 신통치 못했고 신중현은 정부의 문화정책에 희생되어 70년대 음악생활을 마감하고 만다. 80년대에 신중현에 대한 규제가 풀려 재기하지만 제2의 엽전들인 ‘세 나그네’의 실패와 함께 대중음악의 1선에서 물러난다. 
신중현이 자생적인 록 문화를 탄생시켰다면 한대수는 김민기로 대표되는 모던포크에 미국적인 록을 유입시킨 케이스였다.

한대수는 미국에서 사진과 음악활동을 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충격적인 공연문화를 이 땅에 선보인 최초의 언더그라운드였다. <물 좀 주소>에서의 한대수의 외침은 혁명이었다. 이미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의 문화로써 자리를 잡아가던 포크에 새로운 경향을 선사한 것이다. 한대수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물 좀 주소>나 <행복의 나라>의 노랫말은 암울한 70년대의 청년문화에서 대단한 상징성으로 자리했고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당시는 70년대였고 군부독재의 문화정책이 있던 시기였다. 심의는 한대수 노래의 상징성에 칼을 댔고 그렇게 이 땅의 록 음악사에 길이 남을 걸작 <멀고먼 길>은 대중에게서 사라진다.

그리고 한대수는 이 땅과 이별을 고하고 70년대에서 자취를 감춘다. 비록 80년대에 <무한대> 앨범으로 다시 컴백을 하고 90년대 다시 그가 주목받고는 있지만 <멀고먼 길>에서 보여준 한대수의 카리스마는 역시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80년대 이후 한 대수의 작품들이 음악적으로는 완성도가 높아졌을 지는 모르지만 포크의 진정한 ‘자유’에 대한 정신은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신중현도 한대수도 우리에겐 안타까운 천재들이다. 우리의 70년대가 그들을 껴안을 수 없었다는 것은 큰 불행이었다. 그들이 끊임없는 창작활동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물음에 답변은 영원한 아쉬움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좌절한 것이 음악 외적인 정치적 현실 때문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겐 크나큰 불행일 뿐이다. 아직도 이들의 작품들 중 대부분이 복각되지도 못하는 현실 속에 이들의 불타는 창작열에 경외감 마저 느껴진다.
‘산울림’ 등장은 신중현과 한대수가 사라진 이후 몹시 새롭고 흥분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산울림 형제들은 음악과는 상관없는 모두 제도권의 최고 교육과정을 이수한 수재들이었다. 대개 대중음악은 계보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70년대를 주름잡던 음악인들이 대부분 신중현과 한번쯤은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산울림은 정말 하늘에서 떨어진 집단임에 틀림없다. 대학가요제에서 <나 어떡해>를 제공한 것이 산울림의 김창훈이었다는 사실도 산울림의 두 번째 앨범에서 <나 어떡해>를 부름으로써 확인된 사실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산울림의 데뷔 음반은 한번도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사운드였던 것이다. 물론 신중현 스타일의 사이키딜릭의 경향이 짙기는 했지만 김창완의 샤우팅과 난해한 건반연주는 정말로 압권이었다. 산울림 1집의 <아니 벌써>는 독특한 김창완의 보컬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건반연주도 매우 일품이었고 <문 좀 열어줘>와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꺼야>등 앨범 전체적인 완성도가 매우 높았다. 1집의 큰 성공으로 연속적으로 3집까지 1년 사이에 발매되는데, 이 모든 창작이 이미 완성된 것들이기에 단기간에 연속적인 명반작업이 가능했다. 2집의 <내 맘에 주단을 깔고>는 산울림 최고의 걸작으로 전주의 기타연주는 정말이지 최고수준이었다. 산울림은 이 후 많은 음반작업을 했지만 사실상 산울림의 최고 작은 3집까지로 봐야 한다. 이후 김창훈과 김창익은 사회생활로 빠지고 김창완은 솔로 프로젝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80년대 한때 삼 형제가 다시 모여 작업을 했지만 예전만 못했다.
산울림과 함께 늘 거론되는 밴드는 ‘사랑과 평화’이다. 산울림이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밴드라면 사랑과 평화는 신중현으로부터 이어져온 계보를 충실히 이행하는 밴드였다. 이미 70년대 최고 테크니션으로 명성을 날리던 최이철 ,송홍섭, 김명곤등의 라인업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멤버였다. 특히 사랑과 평화 1집은 독특한 리듬감에 최이철의 마우스 튜브 연주가 좋은 <<strong style=”padding: 0px; margin: 0px;”>한동안 뜸했었지>가 크게 히트했고 블루스 풍의 <어머님의 자장가>도 인기를 얻었다. 1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곡은 <저 바람>이란 곡으로 독특한 베이스 연주는 너무 훌륭했다.

김명곤의 편곡으로 베토벤의 운명이나 아베마리아등의 클래식 곡이 연주곡으로 실려있는데, 어떤 의도로 녹음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매우 독특한 구성임에는 틀림없다. 사랑과 평화만의 특유의 리듬감으로 새롭게 구성한 클래식 소품들에 대한 느낌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앨범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고려해 본다면 창작곡으로 앨범을 채우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한다. 사랑과 평화는 1집이 큰 성공을 해서 두 번째 앨범작업까지 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해체되었고 80년대에 이남이의 <울고싶어라>가 수록된 3집으로 컴백해서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져오고 있다.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는 정권의 문화정책으로 소멸된 작가정신을 되살린 70년대의 마지막 한국 록의 자존심이었다. 산울림의 음악성은 90년대에 들어 재 평가받고 있는 것은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고 사랑과 평화도 최이철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면서 여전히 최고의 세션밴드로 위치하고 있는 것도 다행스럽다. 이들이 존재하여 80년대 초반 한국 록의 중흥이 가능했고 헤비메탈의 탄생도 가능했다. 신중현과 한대수가 무기력하게 정권의 투항하고 사라진 공허감 속에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가 존재했다는 것은 이 땅의 록 음악사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2.2. 1980년대 초반 – 한국 록의 중흥기 (마그마, 무당, 작은 거인, 동서남북) 
 1978년 개최된 대학가요제는 샌드페버스의 <나 어떻게>(산울림의 김창훈이 만든 곡이다)가 대상을 차지하면서 대중음악계의 신선한 뮤지션의 공급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할을 80년대 초반까지 충실히 이행하여 라이너스, 옥슨80, 활주로, 블랙 테트라 등 대학가의 록밴드들을 주류음악계로 이끌어내는 효과를 주었다. 물론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방송가의 스타메이커로 전락하면서 이제는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80년 대학가요제에서 배출한 ‘마그마’는 80년대 초반 록씬에 가장 주목받을만한 밴드였다.
 <해야>로 대학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은 ‘마그마’는 당시 수많았던 캠퍼스밴드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조하문을 중심으로 멤버들은 영국의 하드록을 정통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했다. <해야>에서의 변박에 이은 기타연주는 비록 이펙터의 부재로 다양한 테크닉을 선보이지는 못하지만 힘있는 조하문의 보컬에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이룬다. 다만 스쿨밴드로서의 위치 즉, 전문 연주인이 아닌 아마추어로서의 어설픔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산울림이나 사랑과 평화등 동시대 최고 밴드와 견주어 볼 때 기타, 드럼, 베이스로 이어지는 하드록의 직선적인 멜로디라인면에서는 우수할지는 몰라도 전체적인 사운드에서는 처지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당시 연세대 재학중인 학생의 신분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마그마의 녹음작업은 단 한 장의 음반으로 그치고 멤버 모두 사회 속으로 흡수된 점이 아쉽다.


 ‘무당’의 경우는 신중현의 정통적인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이 만든 밴드였다. 당시로서는 가장 헤비메탈한 사운드를 보여주는 밴드 중 하나였다. 전설의 기타리스트로 제대로 된 녹음도 없이 80년대 기타리스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중산이 한때 재적했던 밴드이기도 하다. 특히 83년 작인 무당 2집은 사실상 헤비메탈 사운드를 최초로 선보인 음반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헤비메탈의 시조는 85년의 시나위 1집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무당2집에서 최우섭의 기타연주는 헤비메탈의 기타리프와 연주스타일이 무척 흡사하다. 물론 가요적으로 부른 보컬은 아쉬울 뿐이다.

기타연주만 본다면 무당2집에서 연주는 충분히 헤비메탈사운드의 시조라 해도 손색이 없지만 샤우팅없이 얌전하게 부르는 보컬은 힘이 전혀 없었다. 다만 <그 여름을>과 <그 길을 따라> 등에서의 사운드는 매우 훌륭했고 레드제플린의 <모비딕>을 연상시키듯 헤비 드러밍이 일품인 ‘무당’도 좋았다. TV쇼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면서 열심히 활동을 했지만 무당은 2집의 상업적 성과가 그다지 좋지 못하자 해산되고 만다. 80년대 중반 시나위의 불타는 사운드로 헤비메탈이 전성기를 이룰 때 무당이 함께 하지 못한 것은 80년대 록씬의 최고 아쉬움이다. 물론 그들이 있었기에 신대철, 이근형의 헤비기타사운드가 가능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헤비메탈 사운드에 그 누구보다도 먼저 눈을 떳던 무당이었기에 짧은 활동만으로 사라진 무당의 존재가 무척 아쉽다.
 김수철의 화려한 기타로 기억되는 ‘작은 거인’은 두 번째 앨범에서 한국적 헤비메탈사운드에 기틀을 다진다. 기타 연주만으로 볼 때 김수철은 분명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이며 작곡자이다.

김수철 역시 스쿨밴드 출신으로 이미 작은 거인 1집에서 그 가능성을 선보였으며 두 번째 앨범에서는 일본인 엔지니어를 초빙하여 조금 더 나은 음질의 음악을 생산해내었다. 대중적인 <별리>를 머릿곡으로 한 이 앨범의 <새야>에서 하드록 감각은 출중했다. 김수철은 기타리스트로서 신중현에 필적할 만한 훌륭한 기량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작은 거인 2집 이후 록커로서 김수철은 솔로로 전향하면서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라선다. 80년대 최고 발라드 가수로 위치했고 작은 거인 2집의 사운드는 거의 접어두고 오히려 국악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전자음악을 이용한 대작 ‘팔만대장경’을 생산해낸 김수철은 이제 장르를 초월한 거장의 위치에 다다랐음에도 불구하고 못내 아쉬운 것은 작은 거인 2집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 넘치는 기타 연주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이 버클리 유학을 떠나기 전 재적했던 밴드로 알려진 ‘동서남북‘은 98년 시완에서 재발매 되 기전까지 전설 속에 묻힌 밴드였다. 입에서 입으로 명곡 <나비>의 소문으로 인해 80년대 잠시 발매되었다가 사장되어버린 음반이 재발매된 것이다. 그러나 <나비>의 위력에 비해 나머지 곡들은 너무나 평범한 가요 스타일이라는 데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어쨌든 <나비> 단 한 곡으로 동서남북은 80년대 록을 이야기할 때 거론될 가치가 있다. 이탈리안 아트록 이 뉴트롤스의 재해석에 힘입어 90년대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우리의 연주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특히 현란한 키보드 연주는 재즈로 전향하기 이전 김광민의 훌륭한 록 테크닉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주류 음악 속으로 흡수하기엔 다소 난해한 연주였지만 <나비> 사운드는 끊임없이 실험하는 록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80년대의 걸작이다.
80년대 초반은 이 땅의 록음악에 있어서는 중흥기였다. 비록 이렇다할 만한 정형된 사운드는 없었지만 수많은 캠퍼스 밴드가 존재했고 나름대로 완성도 있는 음악을 계속 공급해주었기 때문이다. 철저히 통제되는 신군부의 문화정책에 록은 외면 받아왔지만 점차 FM방송이 전국으로 전파를 타고 부틀랙 음반(소위 ‘빽판’)이 유통되면서 록 마니아층이 두터워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80년대 초반의 상황이 있었기에 85년 이 후 들국화와 시나위라는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2.3. 1980년대 중ㆍ후반 – 헤비메탈의 시대 (들국화, 시나위, 백두산, 부활, 작은 하늘, Rock in Korea)


 1985년 ‘들국화’의 데뷔는 한국 록의 이정표와 같았다. ‘엽전들’ 이후 근 10년 만에 나타난 슈퍼밴드였다. 전인권의 파워보컬은 청중을 압도했고, 조덕환과 최구희의 기타도 힘이 있었다. 최성원과 허성욱의 여성스러움은 들국화의 가치를 배가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들국화의 성공은 단지 음악적인 면에 국한 시켜서는 안 된다. 방송매체를 거의 무시하면서도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위력과 소위 80년대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기폭제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김민기와 신중현으로 대표되는 포크와 록의 계보를 한데 모아 80년대 언더그라운드에 포크와 록이 공존하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을 외치는 전인권의 목소리는 <물 좀 주소>의 한대수에 필적 할만 하고 따로 또 같이에 맥을 잇는 <매일 그대와>에서의 최성원의 목소리도 좋았다. 조덕환과 최구희의 기타연주도 그렇게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느낌이 좋았다. 허성욱의 피아노와 최성원, 전인권의 언발란스한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사랑일 뿐이야>는 베스트 트랙이다. 어떤 날이 리메이크한 진보적인 성향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과 조덕환 작품인 <아침이 밝아 올 때 까지> 그리고 히트한 <행진>과 <세계로 가는 기차>까지 수록곡 모두가 80년대를 대표할 만한 명곡들이다. 비록 전인권과 최성원의 보이지 않는 경쟁에 두 장의 정규앨범을 끝으로 들국화의 역사는 막을 내리지만 80년대 그들의 위치는 80년대 그 자체라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있어 80년대 대중음악은 가능했다.
 ‘시나위’ 1집은 정말 한국 록 30년 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본격적인 헤비메탈 1호 밴드라는 수식어가 늘 시나위에 따라붙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물론 헤비메탈사운드는 ‘무당’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작은 거인’ 2집에서의 김수철의 기타연주도 거의 완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나위가 헤비메탈의 시조라고 불리 우는 이유는 앨범의 완성도에 있다. 시나위 1집을 들어보면 분명 무당이나 작은 거인과 사운드에서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신대철의 힘있는 기타연주에 어우러지는 임재범의 샤우팅 창법은 이미 LA메탈사운드를 섭렵하는 우수성이 있다. 더구나 1983년 작인 무당 2집과 견주어보면 시나위의 사운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당시로선 분명 시나위의 음악은 혁명이었다. 누구나 동경하고 있었지만 이뤄내지 못한 록커의 꿈. 그것이 헤비메탈이었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완벽히 이뤄낸 것이 바로 시나위였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에서 영국의 뉴 웨이브 헤비메탈사운드를 재현했으며, ‘남사당패’의 독창적인 기타리프는 신중현의 대를 잇는 멋진 작품이었다. 물론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에서의 임재범의 보컬은 일품이었다. 그리고 <아틸란타의 꿈>에서는 블랙사바스의 웅장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멤버들이 모두 20대 초반이었다는 점이 더욱 놀라운 사실이었고 시나위는 이후 한국 록을 이끌어 가는 주축밴드로 자리하며 8~90년대 한국 록의 뿌리로서 굳건히 존재해오고 있다.
신대철의 기타는 분명 당대 최고 테크니션임는 틀림없지만 시나위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백두산’의 김도균 역시 독창적인 능력을 지닌 훌륭한 기타리스트였다. 신대철은 임재범, 김종서, 김성헌등 당대 일류 보컬리스트들과 호흡을 맞춰 최상의 주가를 올린 반면 김도균은 유현상과 함께 했다는 점이 불운했다. 어떤 이유에서 유현상과 김도균이 한배를 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백두산 1집에서 유현상의 보컬은 전혀 헤비메탈과 거리가 멀었다. 시나위와 비슷하게 데뷔를 했지만 시나위 1집과 백두산 1집과의 비교는 어불성설이다. 비록 TV쇼 무대에서 웃통을 벗어 재끼며, 연주를 해도 백두산과 시나위의 완성도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물론 시나위는 20대 초반의 멤버로 구성된 반면 백두산은 어느 정도 세션 경험이 있는 중견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연주의 완성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헤비메탈이란 장르에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 앨범에서 백두산의 선택은 유현상의 가성과 영어가사이다. 유현상의 가성 창법은 효과가 있었다. 김도균은 브리티쉬 하드록에 정통한 연주인으로 백두산 2집에서 딥퍼플이나 레인보우의 음악에 뿌리를 둔 연주를 보여주고 있다. 백두산 2집은 김도균의 화려한 기타테크닉을 선보인 작품으로 다소 평가 절하되고 있지만 재음미해볼 필요는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김도균의 화려한 기타연주는 백두산의 틀 속에 어울리지는 못했다. 또한 유현상 역시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보다는 트롯 가수가 더 적합했다. 백두산은 2집 이 후 존재이유를 찾지 못하고 해체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부활’은 김태원과 이승철의 카리스마가 굉장히 강한 밴드였다. 김태원은 The end라는 밴드를 이끌면서 언더그라운드에서 인지도가 높은 기타리스트였다. 이후 김종서와 부활을 만들었는데 앨범 제작 당시에는 김종서가 탈퇴하고 이승철이 보컬을 맡았다. 부활 1집은 또 다른 기타리스트인 이지웅과 트윈 기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보컬리스트 이승철의 영향으로 부활의 음악은 시나위가 보여준 헤비메탈함이 많이 상쇄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게다가 김태원 역시 멜로디 라인을 중시한 연주를 즐겨해서 반복적인 리프를 중시하는 헤비메탈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타리스트 김태원의 테크닉은 최상급이었다. 빅 히트곡 <희야>에서의 종소리나 <인형의 부활>에서 보여준 속주는 분명 절정의 기량이었다. 이승철의 보컬은 샤우팅보다는 R&B적인 테크닉이 뛰어났기 때문에 하드한 록커로서의 역량은 다소 처지는 느낌이었다. 부활은 1집의 대성공으로 ‘회상’을 컨셉으로 한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하는데, 1집보다도 헤비메탈함이 더 많이 사라졌지만 연주중심의 멋진 작품이었다. <천국에서>에서 신디사이져와 함께 한 김태원 솔로 연주는 압권이었다. 비록 상업적인 록이라는 비난도 함께 한 부활이지만 김태원의 기타 연주만큼은 그 어떤 밴드들보다도 훌륭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는 80년대 초반부터 스쿨밴드들이 많이 존재했다. 종로나 이태원 등지에서 소규모 콘서트등에서 활동을 하며 제각기 실력을 뽑내기도 했는데, 당시 기타연주에 있어 양대 라이벌은 신대철과 이근형이었다. 신대철이 아버지 신중현의 후광에 힘입어 시나위로 최초의 헤비메탈의 작위를 얻은 반면 이근형은 뛰어난 실력파였음에도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운한 케이스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근형은 시나위, 백두산, 부활이 이미 휩쓸고 간 뒤에 ‘작은 하늘’로 뒤늦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작은 하늘은 당시 유행하던 LA메탈사운드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시나위가 두 번째 앨범에서 김종서의 목소리로 주가를 올리던 때에 이근형은 비슷한 사운드에 김성헌이라는 신예를 기용하여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과는 시나위의 KO승이었다. 그렇지만 작은 하늘은 이근형의 화려한 테크닉에 김성헌의 파워보컬은 일품이었다. <떠나가야지>와 <깨어진 약속>등에서의 이근형의 필은 역시 최상급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헤비메탈 밴드가 군웅할거하던 당시 상황에서 독창적이지 못하고 LA메탈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은 하늘은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당시 헤비메탈의 기준은 시나위였고 그보다 못하면 그냥 잊혀지는게 당시 상황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은 하늘은 백두산 2집과 함께 80년대 헤비메탈을 이야기할 때 한번쯤 재음미해볼 필요성이 있다. 신대철과 쌍벽을 이루던 이근형의 기타와 임재범, 김종서와 함께 80년대 3대 보컬로 평가받는 김성헌이 함께 한 작은 하늘은 완성도 높은 음반임에는 틀림없다. 이근형은 작은 하늘의 실패이후 시나위 멤버였던 김종서, 김민기, 박현준을 영입하여 카리스마를 조직하지만 역시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해체하고 만다. 또 90년대에는 신성우를 발굴하지만 그렇게 의미 있는 작업은 아니었다. 김성헌은 시나위 3집과 Rock in korea에 참여후 음악계를 떠났다.
86년에서 87년까지는 헤비메탈의 전성시기였다. 수많은 아마추어 밴드들이 결성되었고 또 해체되었다. 고등학교의 스쿨밴드의 활동도 다양했다. 그러나 메이져 밴드인 시나위, 부활, 백두산이 멤버들의 이합집산에 의해 해체나 활동정지 상태에 빠지면서 록밴드의 활동은 크게 위축된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대표적인 밴드가 크라티아와 아랄란쉬이다. 최민수와 이태섭이 이끄는 이들은 LA메탈에서 시애틀 사운드인 쓰래쉬메탈을 받아들인 최초의 밴드들이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음반 한 장 발매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 때 Friday afternoon이란 컴필리언 음반을 통해 헤비메탈의 새로운 사운드가 실험되었다. 이 컴필리언은 세 번의 앨범작업을 하지만 크게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하나의 시도로서 기억된 채 사장된다.
그런데  Friday afternoon 앨범에 기존 메이져밴드의 뮤지션들이 자극을 받아 대형 프로젝트를 구성하는데, 이른바 ‘Rock in Korea’였다. Rock in Korea단순한 컴필리언 앨범이 아닌 여러 밴드들의 멤버들이 헤쳐 모여 형식으로 잼을 구성하여 연주한 독특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80년대 기타리스트의 정신적 지주인 이중산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 80년대 중반 고교 스쿨밴드의 최고 기타리스트였던 손무현과 오태호의 참여도 눈에 띈다. 물론 임재범과 김도균의 콤비는 이후 아시아나 탄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80년대 헤비메탈 최고 명곡 를 완성하였다. 김종서, 김성헌, 임재범 등 3대 보컬리스트들의 목소리를 한꺼번에 비교할 수 있다는 점도 특색이 있다. 비록 신대철, 이근형의 기타가 빠졌지만 김도균, 손무현, 오태호와 이중산의 기타는 80년대를 대표한다 해도손색이 없다. 80년대의 끝자락에서 끝없이 불타던 헤비메탈사운드를 마지막으로 정리한 Rock in Korea는 시나위,부활,백두산의 헤비메틀 1세대의 마지막과 80년대 식의 록음악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4. 1990년대 초ㆍ중반 – 새로운 조류 (이현석, H2O, Next, 서태지, 안치환, 강산에)
80년대식 헤비메탈은 90년 결성된 ‘아시아나’와 ‘카리스마’라는 슈퍼밴드의 앨범작업으로 끝을 맺는다. 이들은 80년대를 호령하던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되었지만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단발적인 작업으로만 만족해야만 했다. 이후 90년대에는 헤비메탈의 2세대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밴드가 스트레인져, 디오너서스, 아마게돈, 더 클럽, 제로지 등이다. 그리고 이들 밴드의 대표주자들인 서안상, 이시영, 안회태 등이 만든 미스테리와 몽키헤드까지가 헤비메탈 2세대로 보면 좋을 듯 싶다. 그렇지만 이들의 활동은 80년대 중반 1세대들의 모습에 비해 그다지 좋은 활동을 보이지는 못했다. 이미 서구의 팝도 헤비메탈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음에도 LA메탈 중심의 활동을 했고 디젤, 터보, 나티, 아발란쉬 등 스래쉬 메틀을 구사하는 밴드들도 메탈리카에 필적할 만한 사운드를 생산하고 있었음에도 대중의 이해부족으로 답보상태에 머물러야만 했다. 어찌되었든 이 당시 실력파로 활동하던 서안상, 안회태, 이시영, 김병삼, 배재범, 임덕규, 김동규 등이 현재 회자되는 인물들이 아닌 것을 보면 90년대 초반 한국 록의 모습은 매우 상황이 좋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비록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여전히 7~80년대 뮤지션들이 추앙 받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말이다.
그러나 92년 말에 발매된 이현석의 음반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미스테리 1집과 함께 메탈마니아의 주목을 받았던 음반으로 기타리스트 이현석의 솔로 프로젝트 앨범이다. 이현석은 80년대 후반 손무현, 오태호와 함께 고교 스쿨밴드의 최고 기타리스트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손무현은 김완선의 작곡자로 오태호는 이승환의 파트너로 모두 제도권으로 흡수되어 버린 뒤, 이현석만이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표현해 내었다. 이현석 1집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기타연주 음반이다. 특히 잉베이 맘스틴의 주도아래 범주화된 바로크 메탈을 구사한 국내 최초의 음반이기도 하다. 기타라는 악기의 각종 이펙터들이 발전하면서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유럽의 기타리스트들을 중심으로 한 기타연주 음반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기타리스트들의 실력을 가름하는 잣대는 다름 아닌 스피드였다. 얼마나 빨리 기타를 연주할 수 있느냐가 바로 기타리스트의 실력이 되곤 했던 것이다. 이현석은 1집에서 속주기타연주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현석 1집은 밴드를 구성하지 못해 기타와 베이스는 직접 연주하고 드럼머쉰과 프로그래밍으로 나머지 부분을 채웠다고 한다. 그래서 사운드면에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기타연주 하나만으로도 멋진 음반이었다. 1집의 반응이 괜찮았는지 2,3집이 계속 제작되었는데 이미 시대는 속주기타를 떠나 얼터너티브 쪽으로 변하고 있어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현석은 90년대 후반에 김경호의 솔로음반에 세션으로 참가하고 최근에 <이현석 프로젝트>라는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H2O’ 2집은 사실상 헤비메탈 시대가 끝나고 모던 록의 시대를 알리는 최초의 완성도 높은 음반이었다. 김준원을 중심으로 한 하드록 밴드였던 H2O가 카리스마의 박현준, 김민기와 시나위 출신으로 베이스와 신디사이저에 모두 능한 강기영을 새로 영입하여 변신을 꾀하였다. 앨범 자켓에서 짧게 정돈된 머리를 보면 이들에게서 80년대 헤비메탈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강기영, 김민기는 가수 ‘봄여름가을겨울’의 라이브에 세션으로 참여하면서부터 이미 헤비메탈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어졌음을 알 수 있었지만 박현준의 세련된 기타연주는 다소 의외였다. U2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깔끔한 리듬기타는 매우 훌륭했다. 전반적으로 볼 때 U2와 폴리스의 스타일을 추구한 듯 싶다. 그리고 1집에서 샤우팅을 하던 김준원도 절제된 보컬을 선보이고 있다. H2O는 경쾌한 하모니커 사운드가 인상적인 <걱정하지마>의 빅히트로 90년대 초반 TV쇼에 자주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H2O는 듀스 2집에 참여하고 듀스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기영, 박현준이 여러 가지 이유로 탈퇴하고, 김민기도 솔로로 독립하면서 해체되고 만다. 해체직전 H2O는 제작사의 계약관계 때문에 3집 <오늘 나는>을 발표하지만 3집에 대한 활동은 없이 해체된다.
여러모로 볼 때 90년대는 80년대보다 이전 세대에 대한 정통성이 뒤떨어지는 시대임에 틀림없다. 80년대 그 뜨거웠던 헤비메탈의 주역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제도권으로 흡수되고 이 땅의 록음악은 90년대 식으로 새로이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성공한 케이스인 ‘넥스트’를 보더라도 그렇다. 물론 리더인 신해철은 80년대 후반 대학가요제를 통해 등장을 한 뮤지션이기는 하지만 그가 몸담았던 ‘무한궤도’ 역시 정통성에는 거리가 멀었다. 신해철은 참 독특한 뮤지션이다. 분명 그는 록에 대한 이해가 보통 뮤지션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해철은 근본적으로 테크노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뮤지션으로 넥스트의 2집에서 4집까지의 활동은 그의 전체 음악 활동에 비춰 본다면 다소 의외성이 강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여름사냥 출신의 기타리스트 정기송과 함께 만든 다소 모던록에 가까웠던 1집 음반과는 달리 스트레인져의 임덕규와 정기송이 번갈아 가며 연주하는 2집은 스래쉬 메탈을 선보여 충격을 주었다.

<이중 인격자>에서의 메가데스 스타일은 놀라웠다. 발라드나 댄스 뮤지션으로 알려져 있던 신해철이 샤우팅을 할 줄은 누구도 몰랐다. 더군다나 이렇게 완성도 높은 스래쉬를 그가 연출해 낼 줄은 정말 몰랐다. 헬로윈사운드를 연상시키는 <껍질의 파괴>의 대곡 스타일도 무척 인상이 깊었고 신디사이져 연주와 철학적인 노랫말이 좋은 <불멸에 관하여>는 베스트 트랙이다. 인지도 높은 신해철이 완성도 높은 스래쉬 매탈을 선보이면서 90년대 록은 장르의 확산을 경험할 수 있었다. 90년대 초반 여러 밴드가 실패한 스래쉬 메탈을 넥스트가 완성하면서 이 땅에는 ‘크래쉬’라는 대형 밴드가 탄생할 터를 만들 수 있었다. 넥스트는 2집의 성공에 힘입어 록밴드로서는 최초로 수많은 지지자를 확보하였고 3집과 4집에는 다운타운 출신 기타리스트 김세황과 감각적인 김영석을 영입하여 안정된 사운드를 선보였다. 4집 라젠카 이후 신해철은 모노크롬으로 그리고 나머지 멤버는 패닉 출신의 김진표와 노바소닉을 결성하여 활동 중이다.
90년대 주류음악을 거론할 때 ‘서태지’를 빼놓을 수는 없다. 서태지는 엔터네이너로서 90년대식 표본을 설정해 주었고 랩과 댄스에 대한 새로운 시류를 개척하기도 했다. 사실상 90년대 주류 음악의 처음과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서태지의 영향력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록을 이야기할 때 랩과 댄스의 귀재인 그가 거론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는 랩퍼이기 전에 록커였기 때문이다. 시나위 4집에서 베이스를 담당하면서 서태지의 프로 음악세계는 시작되었다. 무슨 이유에서 그가 솔로 음반을 준비하면서 비박스와 랩을 첨가하며 백댄서를 거느린 댄싱음악을 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 그의 음악은 보통 댄스하고는 달랐다. 그의 랩은 힙합의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데뷔 곡 <난 알아요>에서 헤비기타리프는 분명 혁명이었다. <하여가>에서 이태섭의 기타 솔로는 스래쉬 메탈의 그것과 일치하였고 3집에서는 마침내 록커의 위치로 돌아서고 만다. <교실 이데아>에서 안흥찬의 목소리를 빌어온 외침이나 <내 맘이야>의 거침없는 지껄임은 록의 저항성과 파괴력을 모두 갖추고 있다. 서태지는 궁극적으로 <발해를 꿈꾸며>나 <널 지우려고 해>에서와 같은 얼터너티브 성향을 추구한 듯 하다. 그것은 4집의 <시대유감>과 <필승>에서처럼 하드코어적인 이미지와 함께 완성되어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이후 발매된 솔로 음반에서는 <컴백홈>같은 힙합요소는 완전히 거세되고 완성도 높은 모던 록을 보여주고 있다. 서태지의 수많은 공적 중에 가장 위대한 점은 록의 제도권화일 것이다. 서태지 이후 대중의 귀는 록에 관대해졌다. 일부 매니아에 국한되었던 록음악이 공중파를 탈수 있었고 90년대 중반이후 시나위의 재결성과 윤도현 밴드의 활동이 가능했으며 인디 록의 탄생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서태지로 인해 주류의 음악이 천편일률적으로 댄스화가 되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결코 서태지의 음악은 ‘댄스를 위한’음악이 아닌 근본적인 록의 정신을 갖춘 음악이었다.
넥스트와 서태지의 열풍에 90년대의 록은 자극적인 성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는 70년대부터 면면히 이어온 포크계의 침체로 작용했고 결과적으로 90년대 초반의 포크는 김광석이 혼자 짊어지다시피 했다. 그와 중에 ‘강산에’의 등장은 신선하고 작은 충격을 주었다. 조용히 발매된 강산에 1집은 소비성향이 짙던 90년대 주류의 정서와는 다소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목소리는 김현식 분위기에 음악 스타일은 들국화의 전인권과 많이 닮아있었다. 한마디로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정서를 제대로 표현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수박>과 <에럴랄라>에서 거침없이 내뱉어내는 보컬은 “그래 노래란 이런 것이야”를 느끼게 한다. 특히 <라구요>의 노랫말과 멜로디는 성인취향에 맞아떨어져 라디오 리퀘스트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강산에는 90년대식 포크 록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이 땅의 록은 그저 강하고 직선적으로만 발전했을 것이다. 강산에의 포크 사운드는 매우 소박하고 정겨웠다. 1집의 성공으로 기획사의 의도가 많이 반영된 두 번째 앨범에서 <너라면 할 수 있어>가 성공하지만 강산에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기엔 너무나 아쉬운 졸작이었다. 그러나 강산에는 3집 <삐따기>와 4집 <연어>를 통해 여전히 훌륭하고 완성도 높은 포크 록을 생산하고 있다. 최근엔 자신의 음악적 모태인 한대수의 음악을 위주로 한 리메이크 앨범까지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80년대식 모던포크는 조동진, 시인과 촌장류의 서정적인 부류와 노찾사를 중심으로 한 메세지 송으로 양분되었다. 그중 메세지송의 대부는 싱어송라이터 ‘안치환’이었다. 노찾사의 주옥같은 곡을 작곡하면서 음악활동을 시작한 안치환은 1,2,3집에서 이전 노찾사의 분위기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의 네 번째 앨범에서는 확연히 사운드를 일신하여 포크로커로서 대 변신에 성공한다. 여전히 가사는 사회 참여적인 메세지가 주를 이루었지만 통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고 목소리도 힘차게 바뀌었다. <수풀을 헤치며>와 <당당하게>는 포크 록으로서 완성도가 매우 높았다. 안치환의 음악의 영원한 화두는 시인 김남주이다. 물론 80년대 대학생 중 김남주의 시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겠지만 안치환은 김남주의 시에 노래를 붙이는 작업을 여전히 좋아한다. 특히 5집에서 <희망은 있다>에 일렉기타 사운드를 입혀 멋진 록을 만들어냈다. 안치환은 현재 여섯 장의 정규음반을 만들었는데, 4,5,6집은 음악적 성향으로 볼 때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것이 좋다. 4집의 포크 록 성향이 점진적으로 완성해 나가는 단계인 셈이다. 특히 5집에서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워>같은 대중성과 음악성을 겸비한 명곡을 생산하기도 했다. 
90년대 한국 록을 거론할 때 넥스트와 서태지 중심의 강렬한 사운드를 거론하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인데, 강산에와 안치환의 포크 록 사운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포크는 이 땅의 대중음악의 한 축으로 포크를 90년대식으로 발전시킨 강산에와 안치환 역시 한국 록 역사에 한 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5. 1990년대 후반 – 그리고 새로운 대안 (크래쉬, 노이즈가든, 이한철, 언니네 이발관, 자우림, GIGS)
 서태지의 등장은 이 땅의 록이 주류 문화 속에 자리잡을 수 있는 원동력을 주었다. <하여가>의 대히트는 이태섭의 화려한 기타솔로를 이 시대 대중의 귀에 적응시킬 수 있었고 <교실이데아>를 통해 안흥찬의 동물적인 보컬도 라디오 전파에 어울림을 주었다. 덕분에 대기업 라이센스인 SKC에서는 헤비메탈 음악에 관심을 기우렸고 전문 메탈 레이블인 메탈포스를 만들었다. 메탈포스는 소위 2세대 메탈 연주인들에 관심을 기우리면서 그 첫 번째 작품으로 수도권 등지에서 독자적인 라이브 활동을 펼치던 신예 ‘크래쉬’를 발굴한다. 물론 메탈리카나 메가데스가 국내에 수많은 메니아를 거느리고는 있었지만 사실 크래쉬의 성향은 국내 환경에 그다지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멜로디를 전혀 무시하는 스래쉬 메탈보다 한 층 더 과격한 데쓰메탈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이 좋았는지 서태지의 <교실이데아>에 크래쉬가 참여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또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콜린 리차드슨이라는 프로듀서를 영입하여 녹음 자체의 질적 향상을 꾀하기도 했다. 데뷔 앨범의 , 와 유일한 우리말 노래인 <최후의 날에> 등은 정말이지 혁명적인 사운드였다. 2집에서는 실험적으로 하드코어를 하기도 했고 3집은 1집의 콜린 리차드슨을 재 영입하고 영국에서 녹음을 하여 완성도를 매우 높였다. 특히 안흥찬의 음산하고 퇴폐적인 보컬에 스래쉬 기타리듬이 돋보이는 <무상>은 압권이다. 비록 94년 데뷔당시에는 애송이에 불과하고 운이 좋아 메탈포스와 서태지의 영향으로 성공한 케이스로 절하되기도 했지만 이젠 크래쉬의 안흥찬은 국내 최고의 뮤지션으로 성장했다.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스래쉬, 데스메탈뿐만 아니라 하드코어와 테크노까지 장르 확장을 꿈꾸고 있는 안흥찬의 노력이 있는 한 크래쉬의 혁명은 계속될 것이다. 
90년대 후반 가장 완전한 헤비메탈사운드를 구사하는 밴드를 꼽는다면 단연 ‘노이즈가든’이다. 윤병주의 화려한 테크닉과 박건의 파워보컬은 단연코 현존 밴드 중 최고이다. 사운드가든이나 엘리스 인 체인 등의 카피밴드에 불과했던 노이즈가든은 톰보이 록페스티벌에 참가해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프로 음악세계에 데뷔했다고 한다. 노이즈가든 사운드의 핵은 역시 윤병주의 기타에 있다. 윤병주 기타의 매력은 물론 화려한 테크닉에도 있겠지만 독특한 톤에 있다. 기타리스트의 능력 중에는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사운드 메이킹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 면에서 윤병주는 국내 몇 안 되는 독창적인 톤을 지는 연주가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기타연주만 놓고 볼 때 노이즈 가든의 1집과 시나위 6집이 90년대 음반 중 최고작으로 뽑는다. 1집에는 90년대를 대표할 만한 명곡들이 많이 실려있는데, 특히 점층적인 구성이 돋보이는 <유혹>이 베스트이다. 최근 발매된 2집은 윤병주 기타 톤을 더욱 확고히 했고 새로운 시도로 세기말 최고의 화두인 테크노에 대한 접근이 눈에 띈다. 이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지속적인 활동이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이미 밴드의 이합집산으로 인한 음악의 붕괴를 80년대 헤비메탈에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던 록의 새로운 시도로는 ‘델리 스파이스’와 ‘이한철’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김민규, 윤준호로 구성된 델리스파이스는 1집을 통해 모던 록의 가능성을 충분히 시험해 보았다. ‘노캐리어’와 ‘차우차우’가 FM전파를 탈 수 있었고 또 완성도도 매우 높은 성공작이었다. 또 이들에게서 중요한 점은 한국식 모던 록의 완성이다. 물론 H2O 2집에서부터 모던 록 스타일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서태지와 넥스트를 거치면서 다소 모던록의 대중적 이해가 크지 않았는데 델리 스파이스의 완성도 높은 음반작업으로 인해 후배 밴드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후 등장하는 인디 록 밴드들에게 음악적 방법론을 제시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델리 스파이스는 99년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하는데 녹음의 완성도에서 1집을 압도한다. 단연코 99년 최고 음반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꽉 찬 기타 사운드와 뛰어난 편곡력이 돋보인다. 반면 이한철은 델리스파이스보다 먼저 등장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철저히 무시된 안타까운 뮤지션이다. 대학가요제를 통해 등장했고 걸죽한 사투리의 입담으로 토크쇼에 출연하면서 음악성이 평가절하된 불운아이기도 하다. 영화제목을 이용한 1집은 당시 유행하던 얼터너티브를 차용하였으나 ‘델마와 루이스’가 조금 주목받다 말았다. 96년에는 두 번째 앨범 <되는 되는거야>라는 걸작을 발표했지만 왠일인지 대중매체는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이한철 2집은 90년대 베스트 앨범중 하나이다. 신해철이 참여하기도 한 2집은 레게와 테크노를 기반으로 한 훌륭한 펑크록 음반이다. 특히 <애니멀>에서의 변박과 레게의 조화에서 보이는 이한철의 리듬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음악 파트너 장기영과 최근에 ‘지퍼’의 음악을 조직해서 역시 훌륭한 음악을 선보이고 있지만 왠일인지 미디어는 자꾸만 그를 외면한다. 
‘언니네 이발관’의 아마추어리즘은 90년대 최대의 성과물인 인디 록의 탄생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노이즈가든의 윤병주가 프로듀싱해서 완성한 언니네 이발관 1집은  유치한 팀 이름에 재켓 디자인까지 아마추어 냄새가 많이 난다. ‘푸훗’으로 시작되는 음악도 기타를 조금만 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저건 나도 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할 줄 알면 해봐”라고 대답할 줄 아는 뮤지션들이었다. 경력 1년 미만의 멤버들이 창작한 열두 트랙의 곡들은 테크닉에서 유치할지는 몰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경>의 기타 아르페지오나 <쥐는 너야>의 베이스 드러밍 그리고 <산책 끝 추격전>의 사이킬릭적인 이미지 등은 곡 구성의 승리였다. 각각의 곡들도 작사, 작곡 식의 일률적인 명시가 아니라 각각 파트의 구성을 담당한 사람을 명시함으로써 앨범작업이 멤버의 공동작업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음악적인 완성도를 떠나 참으로 곡들의 구성만큼은 신선했다. ‘푸훗’이 인기를 얻고 네티즌을 중심으로 세인의 관심을 받자 두 번째 음반을 제작하지만 1집에서의 신선도는 많이 사라졌다.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려고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마추어 정신으로 무장했던 1집의 구성력은 사라지고 솔로연주가 늘어 2집은 개인적으로 실망을 많이 했다. 아마도 이러한 아마추어적인 음반은 단발적인 작업을 끝을 맺는 것이 더 좋았을 것만 같다.
90년대 이 땅의 록음악에서 최대의 화두는 역시 인디록이다. 저예산 독립음반을 의미하는 인디록은 홍대 앞의 록카페 ‘드럭’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드럭의 고정출연 밴드인 크라잉 넛과 옐로우 키친의 녹음작업을 저예산으로 하고 거창한 홍보나 마케팅 없이 공연장 등지에서 앨범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인디록의 시작이 되었다. 인디록의 주된 장르는 펑크록이다. 아무래도 저예산이기 때문에 앨범제작에 있어 걸림돌이 많이 없기 때문에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기 때문에 아마추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펑크가 인디록의 주류 장르로 정착할 수 있었다. 드럭이 ‘아워 네이션’이란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음반작업을 하면서 크라잉 넛이나 노 브레인 같은 밴드 대중에게 익숙하게 되었고 재머스, S&H, 블루데빌 등 많은 클럽에서 수많은 실력파 아마추어가 등장하게 되었다. 단군이래 가장 많은 밴드가 결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홍대 앞 클럽가는 호황을 누렸다. 이들 인디밴드들 중에 주목할 만한 밴드를 꼽으면 허클 베리핀, 노브레인, 레인리 선, 미선이, 토스트, 새드 리전드 등이 있다. 특히 최근들어서는 메이져 레이블을 통해 <인디파워 1999>라는 컴필리언 음반이 제작되는 등 메이저로의 등극도 눈에 띈다. 그리고 장르도 펑크에서 테크노와 하드코어 심지어 힙합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점차 인디록도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정착되는 느낌이다. 이는 상당히 바람직한 것으로 아마추어들의 무대와 음반작업을 적은 예산으로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은 향후 이 땅의 대중음악에 질적 향상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90년대 후반에 기존 뮤지션들의 활동으로는 ‘시나위’와 ‘봄여름가을겨울’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10주년 기념음반에서 기존의 재즈와 블루스 위주의 음악에서 복고적인 록 사운드를 선사하는데, 많은 후배 뮤지션이 참여해서 완성도를 높여 주었다. 신대철이 이끄는 시나위의 활동 재개는 상당히 의미있는 행보였다. 시나위의 재결성은 신대철이 손성훈의 솔로 음반을 프로듀싱하면서 알게된 뮤지션들과 의기투합해서 재 결성되었다. 4집의 실패와 함께 80년대 헤비메탈 시대가 끝나면서 시나위도 함께 사라졌다. 블루스 록 밴드 ‘자유’를 결성하기도 한 신대철은 결국 자신의 음악의 본류인 시나위의 이름으로 다시 컴백했다. 손성훈과 함께 한 5집은 시대적 영향으로 그런지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화려한 신대철의 테크닉이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당시 그런지 스타일의 연주도 거의 독보적이었다. 그 뒤, 김바다를 새로운 보컬로 영입하고 제작한 6집은 시나위 2집 이후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명반이다. 노이즈가든 1집과 더불어 90년대 최고의 록 음반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예전 시나위에 비해 현실 참여적인 가사가 일단은 눈에 띄고 블루스 필을 기반으로 한 얼터너티브 사운드는 잘 다듬어져 있다. 김바다의 보컬도 걸죽하고 퇴폐적으로 매력이 있었다. 현재는 70년대 사운드를 재현하는 7집 ‘사이키델로스’를 발표하고 80년대 이루지 못한 일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잦은 멤버 교체로 시나위의 정통성을 본다면 오히려 김종서 밴드(김종서, 김영진, 김민기 등 기타를 제외한 부분이 모두 전 시나위 멤버들이다.)보다 현 시나위가 처질지는 모르지만 시나위의 실질적인 주체인 신대철이 이끄는 시나위는 분명 80년대부터 이어져오는 한국 록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요즘 활동이 주목되는 밴드는 ‘자우림’과 최근 앨범을 발표한 ‘GIGS’이 있다. 자우림은 이미 석 장의 앨범을 발표한 중견밴드의 위치에 있다. 홍대 앞 클럽밴드들 중 가장 성공한 밴드가 자우림이다. 현재까지 언더와 오버의 경계선을 가장 잘 활용하며 양쪽의 지지세력을 나름대로 확보하는 유일한 밴드이기도 하다. 사실 산울림 카피밴드에 불과했던 자우림은 여성 보컬 김윤아를 영입하면서 많이 성장을 한 밴드이다. 여성 보컬으로서의 카리스마는 허클베리핀의 남상아나 솔로 활동을 하는 황보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김윤아는 자기 색이 강하다. 그렇지만 김윤아의 보컬만으로 자우림이 이뤄졌다면 벌써 팀이 깨졌을 것을 텐데 다행히 자우림엔 이선규라는 좋은 기타리스트가 포진하고 있다. 이선규의 기타는 산울림 트리뷰트에 실린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에서 상당히 진한 인상을 주었다. 멤버 전원이 프로그래밍에 참여하여 <밀랍천사 No 9>와 등에서 좋은 결과를 주었다. <나비>라는 대중적인 멜로디도 겸비한 자우림의 앨범은 역시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겸비한 다목적용으로 완성도가 높다. 
‘GIGS(긱스)’는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한상원, 정원영 밴드의 실체이다. 포스트 서태지의 대표주자인 패닉의 이적을 맞이하고 윤도현 밴드 출신의 강호정이 보강된 GIGS는 세기말 최후의 슈퍼밴드이다. 유학파의 대명사 한상원과 정원영은 분명 이 시대 최고의 테크니션이다. 그리고 신예 정재일과 이상민은 이미 패닉 3집과 정원영의 솔로 음반등에서 탄탄한 기본기를 선사한 바 있어 더욱 기대를 하게 했다. 아직 음반이 발매된지 얼마 되지 않아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만 GIGS의 완성도는 최고이다. 특히 슈퍼밴드의 최대 단점인 멤버의 솔로 연주를 극도로 절제하고 팀웍을 중시한 플레이가 맘에 든다. 기타연주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최고 테크니션인 한상원에 감성적인 건반연주자 정원영이라면 그 네임밸류에서 기막힌 솔로 경쟁이 있을 법도 한데, 전혀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새로운 세기에 GIGS는 이 땅에 대표적인 밴드로 손색이 없을 듯 싶다. 80년대 뮤지션 한상원, 정원영, 90년대 뮤지션 이적, 강호정 그리고 다음 시대를 대표할 재목감인 정재일, 이상민이 결합한 GIGS. 그들의 활동이 벌써 기대된다.